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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주 ㅣ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박해로 지음 / 몽실북스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추억의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이 떠오르네요.
한여름에 이불을 뒤집어쓴 채 봤던 극강의 납량특집.
"내 다리 내놔!!!"
아마 이걸 기억하는 세대라면 뭘 말하는 건지 바로 알아챘을 거예요. 우리 고유의 정서 '한(恨)'이 담긴 공포물이라는 것.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한국의 전설, 민담, 신화는 깊게 뿌리박힌 나무처럼 단단하게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피를 튀겨대며 대놓고 잔인한 외국의 공포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한국적인 공포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서서히 온몸을 감싸는 냉기처럼 불안과 공포가 스며들어 급기야 꼼짝할 수 없는 느낌. 한때는 무속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며 배척했지만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 판단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의 삶과 밀착되어 전해져 온 민속신앙이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면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믿지 않는다고 해서 벗어날 수는 없는...
<섭주>는 박해로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처음에 전설의 고향을 언급했던 건 이 작품이 '사파왕(蛇爬王)과 우녀(牛女)의 전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전설인지 들어본 적 없는 내용인데, 뭔가 익숙해요. 사악한 뱀왕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여인.
뱀의 등장만으로도 섬뜩한데, 진짜 공포의 대상은 뱀들을 조종하는 귀신의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더군다나 그 귀신에 씌인 인간까지...
보통 내림굿을 받는 경우는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리면서 방울과 거울 같은 무구를 발견한다는데, 여기에선 그 장소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곳은 바로 섭주.
모든 사건은 그곳에서 시작되었고, 굳게 봉인되었던 그것이 깨어났어요.
섭주의 붕평마을을 다녀간 초등교사 강서경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벌렁했어요.
갑자기 뱀 떼가 출몰하면서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뭔가 사냥꾼에게 몰이를 당하는 기분이었어요. 제발로 덫을 향해 달려가는 짐승마냥 아슬아슬 쫓기는 공포감이랄까. 정말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어요.
솔직히 뱀 귀신도 무섭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람도 무섭다는 생각을 했어요. 악귀가 씌인다는 건 그 내면에 악의가 존재했다는 의미일 테니까요. 아주 작은 악의라도 떨쳐내지 않는다면 그 악의는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나리니, 그때는 인간이 아닌 악귀라 불러야겠지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틈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인데, 섭주라는 곳은 그 틈이 아니었을까요. 혹은 섭리인지 저주인지...
사족을 덧붙이자면 근래 혹세무민의 가짜 무당들이 많아진 것 같아요. 협박하고 저주하는 신을 내세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종교인이 아니라 명백한 사기꾼인 거죠. 우리만 몰랐을 뿐 섭주는 늘 존재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부디 현혹되지 말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