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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 여행자 오소희 산문집
오소희 지음 / 북라이프 / 2021년 3월
평점 :
절판
여행자 오소희 작가님의 산문집이에요.
어린 아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 이전에 작가님의 책을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대부분 아이를 키우면서 포기하는 것들 중 하나가 여행인데, 진정한 여행자에게는 떠나지 못할 이유란 없다는 걸 그때 알았지 뭐예요.
코로나 사태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들 꼼짝없이 집에 갇혔다며 울상인데, 저자는 희희낙락 색다른 여행을 즐기고 있었네요.
"집은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가장 장대한 여행을 하는 곳이다." (6p)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은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순간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세상 곳곳을 여행하던 저자가 20년만에 서울 부암동에 집을 짓고 정착하더니, '집'에 관한 여행기를 들려주고 있네요. 집 안 곳곳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해내는 과정이 여행 못지 않은 즐거움으로 다가오네요. 바로 일상의 재발견!
물론 여행자의 일상은 집이라는 공간에 머물러 있지만, 그의 이야기는 현재의 집과 과거 여행지가 정교하게 맞물려서 굴러가고 있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점점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 보따리마냥... 가본 적 없는 우붓이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붓의 추억이 많이 등장하네요. 저자가 우붓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탈이 굉장히 쉽기 때문이래요. 달리 바꿔 말하면 모든 게 정돈된 일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일 거예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피하는 성격이라면 당연히 위험한 장소로 여길 만한 곳이지만 여행자에게 일탈이란 여행과 동의어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 저자가 우붓을 좋아하는 건 본능이었네요. 맨처음 우붓에서 진짜 우붓인으로 사는 외국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대요. 나중에서야 오토바이 대여가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된 후로는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외국인이야말로 진짜 우붓인으로 사는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네요. 와르르륵 두두두둑 똑같이 우비를 입은 바이커들이 스쳐 지나가고 우연히 낯선 남자의 도움으로 우비를 벗고 젖은 거리에 시간을 맡겼던 풍경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것만 같아요. 부암동 새 집에서 맞는 첫 여름, 비가 내리는 그 순간에 우붓의 일탈이 떠올랐나봐요. 현실은 비 때문에 벽에 곰팡이가 피고 누수가 생겨서 곰팡이를 닦아내고 누수 공사를 해야 하는, 일탈이었다니... 그러니까 저자에게 어쩌다 그 하루가 일탈이 되었고, 우붓 같은 시간이었던 거죠.
"일탈하지 않는 '어른'은 조용히 병든다." (162p)
부암살롱에서 글쓰기 모임을 할 때 저자는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대요.
"어떤 책도 더 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초심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188p)
저마다 살면서 경험했던 초심을 기억해보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그때의 그 마음이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그 초심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요. 어쩌면 여행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초심을 간직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여행도 떠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떠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여행의 의미는 장소에 있는 게 아니었네요. 느림을 매일의 당연한 일부로 여기며 여유롭게 순간을 향유하는 우붓의 순간향유능력자들처럼 우리도 자신의 집에서 얼마든지 느림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어요. 이미 알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을 뿐이에요. 부암동에 사는 그 누군가 덕분에 깨달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