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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각본집 - 용기를 내는 게 당연한 나이
임선애 지음 / 소시민워크 / 2020년 12월
평점 :
드라마 각본집은 읽은 적이 있지만 영화 각본집은 처음이에요.
무엇보다도 <69세 각본집>은 단순히 각본집이라고 하기엔 더 특별한 것들을 담고 있어요.
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감독의 생각이 담긴 각본 일기와 스토리보드가 들어 있어요. 그 과정을 알고나서 완성된 각본집을 읽으니, 마치 눈앞에 영화의 장면들이 펼쳐진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갔어요. 그리고 뭉클했어요.
69세, 용기를 내는 게 당연한 나이.
처음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던 것 같아요.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어요. 그런데 진짜 아줌마가 된 후에 그 말이 몹시 불쾌했던 적이 있어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굉장히 깔보듯 내뱉는 아줌마라는 호칭에 욱해서 따져 물었어요. 왜 내가 아줌마냐고. 그랬더니 움찔하면서 어쩌구저쩌구 하시라고 설명하더군요. 뭐야, 만만해 보여서 시비를 걸었나 싶을 정도였어요. 똑같은 상황에서 남자였다면 넘어갔을 일을 왜 나한테는...
언젠가는 더 나이들어 할머니 소리를 듣겠지요. 그건 상관 없어요. 다만 여자라서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솔직히 저는 나이들수록 용기가 생겨서 좋은 것 같아요. 정말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그것이 삶이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영화 69세의 주인공 효정이 보여준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영화 69세의 주인공 효정은 성폭행 피해자예요. 그녀는 직접 신고했고 증거물까지 제출했지만 사건은 흐지부지 제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도대체 왜?
그러나 잠시 시간을 되돌려서,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인쇄물을 본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심효정. 69세. 저는... 병원 조무사 이중호에게 성폭행 당했습니다." (123p)
69세라는 나이.
그 나이 때문에 성폭행 당한 사실이 묻힐 수도 있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대부분 자신이 고통을 겪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그러나 어느 정도 살다 보면 삶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만 한 때가 오고, 그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진짜 어른이라면 내가 아프듯 남도 아프다는 걸 공감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해요. 편견과 차별 대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과연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되었을까요.
영화와 단편소설은 줄거리가 약간 다르지만 효정이라는 인물을 여러 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의미 있는 것 같아요.
어딘가에 살고 있을 효정, 그녀는 그냥 69세의 할머니가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걸.
그러니 효정의 용기는 살아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삶 그 자체인 것 같아요.
2020년 8월 20일 개봉한 영화 <69세>는 임선애 영화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해요. 2020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감독상 및 연기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박남옥상 수상작이라고 해요. 사실 작년은, 아예 극장에서 본 영화가 없어서 어떤 영화가 개봉되었는지도 몰랐어요. 이렇게 책을 통해 좋은 영화를 알게 되어서 기쁘네요. 각본집이 주는 특별한 감동 덕분에, 영화 <69세>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아요.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