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인의 맛 - 짜장면부터 믹스커피까지 한국사를 바꾼 아홉 가지 음식
정명섭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2월
평점 :
넘쳐나는 먹방 프로그램과 맛집 정보들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어요.
우리는 언제부터 음식에 이토록 열정적이었을까요. 우리의 음식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요.
<한국인의 맛>은 한국 근대사에 등장한 아홉 가지 음식을 통해 우리의 입맛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책이에요.
타임머신을 타고 쑤웅~ 과거 시간여행을 떠나볼까요.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 같은 이야기라서 흥미로웠어요. 주인공은 경성에 살고 있는 류경호 기자예요. 그의 일상 속에 어떤 음식들이 등장하는지 찾아보세요.
정장을 차려 입고 원서동(현재 서울 종로구 법정동) 하숙집을 나서는 류경호 기자는 골목길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냄새를 맡으며 전차 정류장으로 가고 있어요. 전차를 타니 광고판에 기모노와 한복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단팥빵을 먹는 모습 위로 메이지 제과라는 글귀가 보이네요. 목적지인 선은전역에서 내려, 거대한 아지노모도 광고탑이 세워진 광장을 가로질러 미츠코시 경성 출장소(훗날 미츠코시 백화점)로 향하고 있어요. 그곳 일층에 있는 만년필 판매점에서 수리를 맡긴 만년필을 찾으러 간 거예요.
머릿속에는 경성우체국 근처에 화교가 운영하는 청요릿집에 가서 짜장면이 떠올라 먹고 싶지만 꾹 참고 있어요. 오늘은 '별세계'의 악명 높은 부주간 손상섭이 주간하는 기획회의가 있는 날이거든요. 백화점을 나오는데 치마저고리 차림의 여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요. 뭘 먹을 거냐, 돈까스냐 라이스카레냐, 그럼 팥빙수도 먹자는둥 이러쿵저러쿵. 그들을 지나 밖으로 나온 류경호는 마침 신문을 파는 아이와 마주쳐 신문을 산 뒤, 인력거를 타네요.
별세계 잡지사로 GO!
인력거에 올라탄 류경호는 신문을 펼치고, 경제면에는 '일당'이라고 불리는 대일본제당회사에서 설탕의 공급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네요. 가정 생활면에는 일본 요리학교로 유학을 갔다 온 신식 요리 연구가인 황윤경이 다음 달에 YMCA 2층 강당에서 강습회를 열며, 김밥을 비롯한 각종 요리를 직접 만들고 소개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어요. 신문을 다 읽을 즈음 인력거는 잡지사 앞에 도착하네요.
류경호 기자는 별세계 기획회의 시간에 특집호 주제로 음식을 하자고 제안하네요. 좀전에 본 아지노모도부터 짜장면과 돈까스, 설탕과 카레라이스, 단팥빵과 김밥, 팥빙수와 커피까지, 이 음식들은 원래 우리가 먹던 것들이 아니라 새로 들어왔다는 특징이 있어요. 이 음식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우리의 입맛으로 자리잡게 된 과정들을 알아보는 거예요.
아홉 가지 음식들이 등장했던 시대에 살고 있는 류경호 기자라는 인물을 통해 각 음식을 소개하는 방식이 기발한 것 같아요. 단순히 음식 이야기만이 아니라 음식에 담긴 역사와 시대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진진한 역사 공부가 되네요.
사람의 입맛은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먹어온 음식들을 통해 기억되고 그 기억이 전통과 문화가 되기 때문에 낯선 음식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해요. 그런 측면에서 근대 음식들은 우리의 입맛을 개조했다고 볼 수 있어요. 첫 번째로 소개된 아지노모도는 글루탐산나트륨을 분말 형태로 만든 화학조미료예요. 이케다 기쿠나에 박사가 독일로 유학갔을 때 독일의 화학자 리트하우젠이 알아낸 글루탐산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요. 바로 감칠맛. 채소와 물고기를 주로 먹는 일본인들에게 값싼 조미료를 통해 고기 맛을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대요. 아지노모도라는 이름도 처음에는 지세이(미정 味精)로 지었다가 아지모토(미원 味元)로 바꿨고 마지막에 아지노모도로 다시 바꿔서 제품화된 거래요. 우리의 입맛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감칠맛의 정체는 아지노모도였던 거예요. 조선은 광복과 함께 일본이라는 지배 권력을 몰아냈지만 아지노모도는 밀수품으로 남아, 미원과 미풍 그리고 다시다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입맛을 길들이고 있었다니 놀랍네요.
아지노모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극강의 맛이 있어요. 바로 달콤한 맛이에요. 인간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 맛 중에서 가장 중독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단맛을 낼 수 있는 음식 재료는 많지 않아요. 단맛을 내는 설탕은 사탕수수에서 얻을 수 있는데 열대 작물이라 한반도에서 재배할 수 없었고, 조선시대 후기에 주로 중국을 통해 소량만 들어왔다고 해요. 조선에 설탕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시기는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부터이며, 단맛을 추구하는 것이 서구화를 향한 발걸음이라는 인식 때문에 1920~1930년대는 설탕의 전성시대였다고 해요. 더 많은 설탕을 써야만 건강해진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때문에 거의 모든 요리에 설탕이 들어갔고, 전통요리의 맥이 끊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음식의 변화가 심했대요. 하지만 일본이 독점 공급하는 설탕은 너무 비싸고 부족해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네요. 점점 설탕의 부족 현상이 이어지자 설탕의 달콤함을 대체할 수 있는 사카린이 각광을 받았다고 해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설립된 제일제당에서 본격적인 정제당 생산이 시작되었고, 이상하게도 쌀 소비를 줄이고 서구화의 상징인 설탕의 사용량을 늘리자는 식생활 개선운동이 펼쳐지면서 모든 요리에 설탕이 들어가기 시작했대요. 떡볶이의 고추장 양념에 설탕이 들어가고, 거의 모든 양념장에 설탕이 들어가면서 우리 입맛은 점차 단맛에 익숙해졌고, 설탕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닌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조미료 가운데 하나가 되었어요.
식민지로 상징되는 우리의 근대에는 수탈과 침략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 한국사에서 들춰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이 책에 소개된 아홉 가지 음식을 알고나니 근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온 우리의 입맛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흡수해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대표적인 음식이 되었어요. 우리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그 음식의 역사를 들여다봄으로써 한국인의 맛뿐만이 아니라 한국사의 맛까지 느낄 수 있었어요. 한 가지 확실한 교훈은 그때나 지금이나 가짜 정보에 속지 말라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화학조미료와 설탕을 많이 넣은 음식이 건강에 좋다거나 커피를 아이에게 먹여야 튼튼하게 키울 수 있다는 허위 광고와 기사들에 속았지만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자신도 모르게 중독된 맛, 이제는 건강을 위해 바꿔야 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