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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 그리고 새로운 전망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성준 옮김 / 책세상 / 2021년 2월
평점 :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책입니다.
이 책은 100쪽이 안 되는 분량으로 짧고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 미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위기를 정치적 위기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책의 제목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의 다음 구절을 빌린 것이라고 합니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러한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 (39p)
프레이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게모니', '헤게모니 블록', '분배'와 '인정'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부터 알아야 합니다.
저자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려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헤게모니란 지배 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사회 전체의 상식으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과정을 가리립니다. 헤게모니 블록은 조직 차원에서 헤게모니의 대응물이며, 지배 계급이 모은 이질적인 사회 세력들의 연합입니다. 지배 계급은 이 연합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확고히 하며, 피지배계급이 이 질서에 도전할 때는 더 설득력 있는 새로운 상식인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합니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두 가지 측면이 바로 '분배'와 '인정'입니다. 분배 측면은 사회의 경제구조를 다루고, 인정 측면은 사회의 지위 질서에 초점을 맞춥니다. 분배와 인정은 헤게모니 구축의 토대가 될 본질적인 규범 요소들을 구성합니다.
저자는 현재 처한 위기의 정치적 측면은 헤게모니의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러한 헤게모니 위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며, 그가 등장할 수 있었던 조건들을 밝히는 것이 트럼프주의가 몰아낸 이전의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 그 세계관이 무너져간 과정을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트럼프의 등장 이전에 미국 사회를 지배하던 헤게모니는 진보적 인정 정치와 친금융자본적 신자유주의 분배 정치를 결합한 '진보적 신자유주의'였습니다. 문제는 지난 수십 년간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아레서 미국 사회의 부의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노동계급과 중산계급의 삶의 수준이 계속 하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유권자들 사이에서 기존 정치가 자신의 삶을 더 낫게 이끌어주리라는 기대가 완전히 붕괴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등장했고,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저자는 트럼프의 승리가 그저 하나의 돌발 사건이 아니라 '헤게모니의 붕괴'라는 보다 큰 위기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통령 트럼프의 정책은 반동적 포퓰리즘이 아니라 초반동 신자유주의였다고 분석합니다. 트럼프의 초반동적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헤게모니 블록을 구성할 수 없습니다. 포퓰리즘이라는 숨은 선택지가 세상에 알려진 이상, 트럼프를 지지하는 노동계급 분파가 잘못된 인정 정치만으로 오랜 기간 만족하며 머물지는 의심스럽습니다. 트럼프가 없다고 해서 반동적 포퓰리즘이 동맹의 기반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진보적 포퓰리스트와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투표한 노동계급의 계층 간 동맹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기 힘든데, 그 이유는 트럼프에 의해 폭발해버린 심화된 분열과 증오 때문입니다.
프레이저가 주장하는 객관적인 해결책은 진보적 포퓰리즘입니다. 그러나 진보적 포퓰리즘도 안정적인 최종 도잘 지점이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확실한 건 지금 진보적 포퓰리즘이라는 선택지를 추구하지 않으면 현재의 헤게모니 공백 사태가 연장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된 병적 증상, 즉 분노에서 비롯된 희생양 만들기로 표출되는 혐오와 연대 의식이 사라진 폭력 분출 등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신자유주의 경제는 물론이고, 그 경제를 뒷받침해온 인정 정치와도 분명하게 결별해야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 블록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 바이든 정부가 과연 프레이저가 기대하는 진보적 포퓰리즘이라는 새로운 헤게모니를 구축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위기의 미국 정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 책에서는 프레이저의 분석뿐만이 아니라 바스카 순카라의 대담이 실려 있어서 정치 사상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마지막 해제를 읽고나서야 진보적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