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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았던 시간에 - 김소연 여행산문집
김소연 지음 / 달 / 2020년 11월
평점 :
2021년 새해, 드디어 왔네요.
스톱워치를 재설정하듯이 1월 1일, 새로운 달력의 첫 장을 열었어요.
가족끼리 새해의 결심이나 꿈을 이야기하다가 첫 날에 듣는 음악과 책에 의미를 부여하게 됐어요.
왠지 이 음악과 책이 나의 일 년을 위한 선물인 것처럼.
뭘 들을까, 무슨 책을 읽을까.
<그 좋았던 시간에>는 김소연 작가님의 여행산문집이에요.
여행... 불과 하루 전이지만 작년을 떠올리면 다들 자신의 집에 '갇혀' 살았던 시기였어요.
이상하죠. 집은 나를 가두는 곳이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곳인데 여행을 못하게 되니까 갇힌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멀리 바다 건너 낯선 땅으로의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여행이란 잠깐의 나들이에 불과하지만 그 여행 덕분에 일상을 새롭게 리셋할 수 있었네요.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를 읽으면서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보았어요.
말레이시아의 타만 네가라,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밀림이라는 그곳.
짐을 최대한 줄여야 했고, 식당이 딱 한 군데밖에 없어서 비상식량을 싸 가야 했대요.
"우리 여기에 좀더 있을까?" (15p)
일행 중 한 사람이 제안했고, 저자를 비롯한 두 사람이 함께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대요. 지갑 속에 남은 지폐를 모두 모았더니 현금이 부족해서, 묵던 숙소에 체크아웃한 뒤 강 건너 캠프 사이트로 이동하여 두 사람씩 텐트를 잡아 비상식량들로 만찬을 즐겼대요. 그곳 사람들처럼 강에 들어가 목욕하고 머리 감고, 나뭇가지를 주워 와 모닥불을 피웠고, 모닥불로 밥도 끓이고 찌개도 끓였대요. 마지막 밤에는 빗줄기가 점점 드세지는 바람에 너무 추워서 쪽잠을 잤대요. 아침이 되자 비는 개었고, 딱 하나 남은 고체 연료로 어젯밤에 남겨둔 찬밥을 끓여 나누어 먹었대요. 그때 한 친구의 손에 놓인 남은 티백을 보며 말했대요.
"차를 마실 순 없겠지?"
"할 수 있을 거야." (17p)
코펠에 물을 담고, 찻물을 끓이기 위해 타만 네가라의 지도에 불을 붙였고, 땔감이 더 필요해서 수첩도 태웠대요. 버스 티켓, 영수증, 바우처 등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꺼내어 불을 붙였고 찻물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대요. 모두 함성을 질렀고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대요.
마지막 남은 티백으로 뜨거운 찻물을 나눠 마시는 그 순간, 그윽한 향기가 퍼졌고 모두 무릎을 모으고 동그랗게 앉아 오래오래 차를 마셨대요.
저자가 들려준 첫 번째 여행 이야기, 타만 네가라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뜨거운 찻물이 제 마음까지 온기를 전해주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아마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순간인 것 같아요.
"귈레귈레 (안녕히 가세요)" (67p)
터키 사프란볼루, 숙소를 떠날 때 민박집주인이 이층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인사하는 모습이 책속 사진에도 나와 있어요.
따스한 눈길과 옅은 미소.
민박집주인과 일주일 동안 나눈 대화가 공책 한 권 분량이 되었다고 해요. 말 대신 그림으로.
그 그림들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하트를 그리고 터키 말로 'teşekkür ederim 테쉐큘 에데림 (고맙습니다)'라고 적었대요.
말도 통하지 않는 터키에서 저자는 길을 잃고 방황한 적이 없었대요. 무거운 배낭 때문에 힘들었던 적도 없었대요.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 말만 남기고 그냥 가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고, 주변 사람들을 불러와서 제대로 길을 찾을 때까지 도와주었대요. 교통카드 없이 현금만 갖고 버스를 타서 당황했을 때도 버스기사가 괜찮다며 그냥 태워주었고, 내릴 정류장을 몰라서 옆에 서 있던 승객에게 말을 붙였을 때에도 버스에 탄 승객들 모두가 한꺼번에 대답해주었대요. 버스에서 내려 숙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지도를 보고 있을 때에는 누군가 다가와 배낭을 들어주며 숙소까지 동행해주었고, 민박집 여자는 배부르다고 할 때까지 빵과 차를 주었대요. 매일매일 과일을 함께 먹자고 불렀고, 시시때때로 차를 마시자며 불렀대요.
터키를 여행한 다음부터는 여행가방을 끌며 길을 헤매는 듯한 여행객을 보면 저자도 터키 사람이 된다고, 길만 가르쳐주지 않고 찾아가고 싶은 그곳까지 데려다주었대요.
그 좋았던 시간에,
우리가 떠올리는 건 좋은 사람들이었구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왜냐하면 나 역시 좋았던 시간들과 사람들을 추억할 수 있었거든요. 돌아보니 참으로 좋았던 순간들이 많았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