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N번방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그야말로 공포와 분노 그 자체였어요.
2020년 3월 25일, '텔레그램 박사방'의 조주빈 신상이 공개됐어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반성이나 죄책감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2020년 4월, 국민청원 사이트에 '미국 송환은 가혹하다'는 내용의 청원이 올라왔어요. 내용인즉슨 미국 법무부가 손정우에 대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한 것에 대해 그의 아버지가 막아달라는 청원을 올린 거예요. 손정우는 다크웹에 '웰컴 투 비디오'(W2V)'의 운영자로 아동 성착취 영상을 판매·유포한 범죄자예요. 미국 법원은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자에게 징역 600년을 선고했는데, 한국 법원은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했을뿐 아니라 징역 18개월의 솜방망이 처벌만 했어요. 또한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 다수는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솜방망이 처벌조차 받지 않았어요.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예요. 웰컴 투 비디오 이용자들이 흘러들어간 곳이 바로 텔레그램 N번방과 다크웹의 □□□, ○○○같은 사이트였어요.
텔레그램 N번방이 세상에 알려지고, 범죄자들이 체포되기까지 그 뒤에는 '추적단 불꽃'이 있었어요.
정식 기자도 아니고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두 여성이 어떻게 최초 보도자이자 최초 신고자가 되었을까요.
바로 그 피, 땀, 눈물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 있어요.
"2020년, 지긋지긋한 여성혐오 범죄에 지친 이들에게 이 책이 '이제 우리 함께 걸을까요?'라는 인사로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 살아온 환경, 살아온 방법, 살아온 시간이 달라도,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연대'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7-8p)
1년 전, 두 사람은 기자를 꿈꾸는 대학생으로 신문사 인턴 생활을 같이 했던 인연으로 뉴스통신진흥회의 '탐사 심층 르포 취재물' 공모전도 함께 준비하고 있었대요. 기사 주제는 '불법촬영'으로 잡았고, 불법촬영물이 유포되는 소굴을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너무나 쉽게 발견했다고 해요. 그때 '와치맨'이라는 운영자의 공지를 통해 '고담방'이라는 텔레그램 대화방을 알게 되었고, 수십 개의 파생방을 통해 'N번방'으로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되었대요.
텔레그램에 가입한 지 다섯 시간 만에 링크를 받아 N번방 중 하나인 1번방에 입장할 수 있었고, 눈앞에 펼쳐진 영상은 어린아이들의 나체였다고 해요. 고담방과 파생방 회원들이 수없이 말하던 '노예'란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아이들이었고, 그 아이들은 N번방 회원들의 지시에 따라 영상을 직접 촬영해 보냈던 거예요. '갓갓'이라는 자는 아이들을 협박하여 받은 불법촬영물을 텔레그램 대화방에 유포·공유했던 거예요. 이 끔찍한 범죄 현장을 목격한 두 사람이 한 일은 '신고'였어요.
어쩌면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신고했고 적극적으로 경찰에 협조했어요.
만약 우리나라가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법률과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었더라면 '추적단 불꽃'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추적단 불꽃' 덕분에 N번방의 조주빈을 비롯한 공범들을 잡을 수 있었지만, 바꿔 말하면 그들의 피, 땀, 눈물이라는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 B는 2018년 피해가 발생했을 당시 해당 지역 경찰서에 신고했더니 해당 경찰서에서 해외기반 SNS는 수사가 어렵다며 사실상 수사를 종결해버렸다고 해요.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성폭력을 수사하는 전담 팀이 없었대요. 더군다나 수사기관은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한 범죄라고 여기지 않을 정도로 몰랐던 거예요. 이후 B는 2년간 홀로 고통 속에 지내다가 2020년 5월, 대대적으로 N번방 사건의 갓갓이 잡힌 후에야 비로소 피해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대요.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였던 손정우의 솜방이 처벌은 법관들이 디지털 성범죄를 가볍게 여긴 탓이에요. 그건 법관들뿐 아니라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 국회 접수 요건인 동의자 수 10만 명을 달성하여, 20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는 3월 5일에 관련 법안 네 건을 처리했다고 해요. 그런데 처리 직후 법사위 참석자 대부분이 'N번방 사건'과 '딥페이크'를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해서, 어느 국회의원은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처벌할 것이냐?", "생각하는 것까지 처발할 수는 없지 않느냐?", "청원한다고 다 법 만듭니까?", "예술작품이라 생각하고 만들 수 있지 않냐" 같은 발언을 했다고 해요.
[딥페이크 처벌법 만든 고위 공직자들의 안이한 현실 인식 - 경향신문 2020년 3월 18일자, 심윤지 기자] (70p)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시키겠다던 입법부 국회의원들이 이토록 한심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 처참한 현실인 거죠.
두 사람은 N번방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과정에서 일부 언론의 태도에 절망했다고 해요.
언론이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를 보도할 때 피해 사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은 기사가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고, 이로 인한 2차 피해를 유발할 수 있으니 주의해달라고 호소했건만 피해자의 안위는 뒷전이었다고 해요. 사람들이 알아야 할 내용은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인 것이지, 자극적인 피해 사실이 아니에요.
그동안 몰랐던 디지털 성범죄의 현실을 '추적단 불꽃'이 취재했고, 그 참혹한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불'과 '단', 두 사람의 열정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용감한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걸 두 사람이 보여줬어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거예요. 이제 디지털 성범죄를 뿌리 뽑기 위해서 정부가 나서야 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