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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남기는 글쓰기 - 쐐기문자에서 컴퓨터 코드까지, 글쓰기의 진화
매슈 배틀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반비 / 2020년 8월
평점 :
절판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는 글쓰기에 관한 책이에요.
저자는 인류의 역사에서 글쓰기의 기원과 의미, 그 가치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궁극적인 질문은 디지털 시대에 글쓰기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라고 볼 수 있어요.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기에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각자 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글쓰기의 팰림프세스트(palimpsest).
팰림프세스트는 고대에 이루어진 양피지의 재활용으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원본 글이 삭제되거나 일부 지워진 자리 위에 새로운 글을 적어 넣은 표면"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확장된 용례에 따르면 "특히 예전 형태의 흔적을 여전히 간직한 채로 재사용되거나 변경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런 표면과 어비슷한 것"을 가리킨다고 해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 정의를 뒷받침하는 예문으로 토마스 드퀸시의 말을 실었다고 해요.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자연적이며 힘센 팰림프세스트가 또 어디 있겠는가?" (13p)
"글쓰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쓰기는 우리의 인지를 방해하는, 거의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장애물을 내어놓는다고 저자는 이야기해요.
왜 그럴까요. 글쓰기의 힘, 흔적을 남긴다는 자체에 부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흥미로운 소크라테스의 일화가 나와요. 직접 쓴 글을 전혀 남기지 않았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문자의 쓸모뿐 아니라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했어요.
파이드로스와 함께 아테네 외곽을 산책하며 토론하던 소크라테스는 이집트의 신 토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
토트는 전령과 측량의 신으로 진흙과 파피루스로 가득한 나일강의 강둑을 쏘다니는 물새인 따오기의 형상을 한 신이에요. 토트는 산술과 천문학은 물론 주사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발명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글쓰기의 토대가 된 글자 발명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해요. 토트는 자신이 발명한 글자들을 이집트 신왕인 타무스에게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어요.
"이 글자가 있으면 이집트인들은 더욱 현명해질 것이며 기억력도 좋아질 것입니다. 이는 기억과 지혜를 동시에 발달시킬 영약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타무스는 글자 앞에서 회의적이었어요.
"글자의 아버지인 그대는 글자가 도저히 담을 수 없는 특성들을 이야기하고 있군요. 그대가 발명한 글자는 사람들이 기억을 위한 노력을 등한시하게 만들어 결국 잘 잊어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억하는 대신 외부에 있는 글자에 의존하고 말 것입니다. 그대가 만들어낸 영약은 기억이 아니라 회상을 도울 것이며 그대는 제자들에게 진실이 아니라 진실을 닮은 것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것들을 듣는 동시에 그 무엇도 배우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동시에 결국은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실체 없는 지혜를 자랑하여 함께 있기 꺼려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55-56p)
글쓰기를 만들어낸 우리의 두뇌는 신화 속의 토트 신처럼 문맹에서 기호를 시각적으로 해독하며 끊임없이 진화했다고 볼 수 있어요. 진화심리학자들은 두뇌가 읽기와 쓰기를 위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두뇌가 목적에 맞게 적응한 우발적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인간은 신화와 사회, 정치 형태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자 노력했고, 글쓰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 동시에 권력이었다고 보고 있어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의 '문자의 교훈'이라는 절에서 문자를 의사소통이나 언어예술이 아니라 권력이었다고 서술하고 있어요. 글은 권력을 휘두르는 데 유용한 도구이며, 인간 정신에 대한 일종의 독립적인 통치 체계로 상정하고 있어요.
글쓰기는 그 역사 내내 고대의 방식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매체와 양식으로 확장하며 혁신해왔어요. 구술과 문자, 필사본과 인쇄물, 인쇄기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결국 텍스트를 생산하는 도구가 바뀌었을 뿐, 글쓰기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주목할 점은 글쓰기가 인간 의식의 작용으로서 우리 자신을 통해 작용한다는 점이에요. 글이 쓰이는 표면은 변화했지만 글쓰기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 인간관계들이 코드가 되고 소프트웨어가 되어 인간의 정신과 페이지를 만들어낸다는 것. 한마디로 인간 정신의 흔적으로서 글쓰기는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