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내 방 하나 - 손 닿는 만큼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들
권성민 지음 / 해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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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내 방 하나>라는 책 제목과 청록색 표지가 왠지 짠한 느낌을 줬어요.

누군가의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에요.

똑같은 하늘 아래, 사는 모습도 제각각.

멀리서 바라보면 멋져 보이는 삶도, 속내를 알고보면 짠한 구석들이 있더라고요. 사실 짠내 나는 삶이 진짜인 것 같아요. 진짜라야 감동이 느껴져요.

저자는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와 자취하면서 자립해가는,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난 언제 어른이 되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영부영 살다보니 어느새 늙어버린 느낌이라 당혹스럽다고 해야 하나, 억울하다고 해야 하나.

분명 스스로 어른이 되었구나 느꼈던 순간이 있었을 텐데, 제대로 의식하며 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왠지 저자의 경험은 나와는 전혀 다른데, 묘하게 공감되는 구석이 있어요. 가족, 부모님을 떠올리면 뭉클해지는 감정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군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이 빨래였다고... 찬물에 손빨래를 하느라 손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손끝이 시리고, 쪼그려 앉은 두 다리가 저렸던 그 생생한 감각들 덕분에 수축된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그러니까 일상은 소중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꼭 빨래가 아니어도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허투루 놓치지 않고 마음을 쏟는 순간들이, 저 역시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거든요. 

어른이 된다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과정인 것 같아요. 


편견이 무섭구나, 싶었어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나봐요.

머리카락이 길다고 해서 다 여자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책날개에 저자의 사진은 분명 여자였어요, 아니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뽀얀 얼굴과 가녀린 목선, 짙은 청록색 블라우스 그리고 살짝 미소짓는 얼굴을 보면서 배구선수 김연경을 닮았구나라고.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처음 자립하는 동생 녀석을 걱정하는 형이라고 자신을 표현해서 무척 헷갈렸어요. 사실 아들이라고 밝혔는데도 혹시나, 하는 상상을 했어요. 나중에 긴 머리의 남성으로 살면서 숱한 오해를 받았던 에피소드를 읽고나서야 의문이 풀렸어요. MBC 예능 PD로 살다가 부당해고를 당했던 시기에 별 생각 없이 길렀던 머리라고, 그냥 놔두면 자라는 머리카락이니까 어느새 어깨에 닿고도 흘러내리는 긴 생머리가 되었다네요.  

본인은 키가 180이 넘는 삼십 대 중반의 남성이라 체격도 큰 편인데, 왜 여자로 오해하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이지만 열에 아홉은 여자로 볼 만한 외모예요. 암튼 긴 머리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서 긴장할 때도 있지만 크게 부담을 느낄 정도는 아니라네요. 다양한 이유로 남들 시선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고충을 알게 됐다는 저자의 경험담을 보면서 약간 반성 모드가 됐어요. 편견을 깨뜨리는 건 존중과 배려인 것 같아요. 인간끼리 상하관계 말고 수평관계로 바라보면 좀 달라지겠죠.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장 불편하고 불쾌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편견으로 똘똘 뭉친 무례한 사람을 상대할 때였어요. 혹시 싫어하면서 닮을까봐, 진짜 어른이 되기 전에 늙은 꼰대가 될까봐, 앞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될 것 같아요.


희망은 노란색.

... 노조 간부로서 파업을 주도했다가 해고된 다른 선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는 하릴없이 내뱉었다.

이게 끝나긴 할까요. 그건 어리광에 가까웠다. 나는 회사에서 쫓겨난 지 고작 1년이 되었고, 내 앞에 앉은 이들은 그보다 세 배가 넘는 시간을 찬바람 속에서 버텨왔다.

... 그런 이들 앞에서 푸욱, 주제넘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말라는 격려에는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그 선배의 웃는 얼굴에서, 어두운 복도 끝 환하게 빛나던 개나리를 보았다.  그래. 희망은 배우는 것이다.   (222-226p)


그러고보니,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 때는 말이야"라고 떠들기 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 축 쳐진 어깨를 토닥여주는 사람, 어른인 척 할 필요가 없는 사람.

결론적으로 저자는 결혼과 함께 어른이 되었어요. 손 닿는 만큼 어른이 되어가는 순간들, 이 책을 통해 배웠네요.



'겪어보니 별거 아니더라.' 이게 쌓여갈수록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삶은 겪어보니 별거 아닌 것들의 누적이 되어간다.

이 책은 그런 과정들의 기록이다. 

... 물어볼 형이 없었던 그 시절의 내가 이 이야기들을 듣는다면 뭐가 많이 달라졌을까.

아니, 자기 삶은 결국 자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만큼 알아갈 뿐이다.

다만 조금은 겁이 덜 났을지도 모르겠다. 

아, 겪어보면 별거 아닌가 보구나. 그 정도 얘기만 옆에서 누가 들려줘도 힘이 나는 순간들이 참 많다.

이 책이 그런 목소리였으면 좋겠다. 

      - 프롤로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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