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장미 인형들
수잔 영 지음, 이재경 옮김 / 꿈의지도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팔로미나."  교수가 성마르게 손짓한다.

"이리 와. 수업 중에 뭐해."

나는 즉각 복종한다. 장미 정원을 폴짝폴짝 가로질러 일행에 합류한다.

내가 도착하자 펜션트 교수가 엄지로 내 미간을 힘주어 누르며 거기 잡혀 있던 주름을 문질러 편다.

"공상 좀 작작해." 교수가 못마땅하게 말한다. "피부에도 안 좋아."   (14-15p)


첫 장면부터 뭔가 찜찜했어요. 

교수, 수업, 복종, 장미 정원, 공상, 피부... 서로 연관짓기에는 어색한 조합인 데다 교수의 태도가 신경에 거슬렸어요. 

주인공인 '나', 팔로미나 로즈(미나)는 이노베이션스 아카데미라는 사립 여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요. 학생들은 일 년 내내 교정에 갇혀 집중 교육을 받느라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아요. 미나가 속한 학년은 모두 열두 명인데, 상향 조정된 기준에 따라 선발된 우수한 학생들이에요. 학교의 표현에 따르면 최정예라고, 아카데미가 배출한 졸업생 가운데서도 최고의 재색을 갖춘 소녀들이라고 했어요. 모두들 학교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귀족 학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학교 이름은 이노베이션(innovation , 기술 혁신)이고, 펜션트 교수의 수업 내용은 온실에서 재배할 신품종 화초를 다루고 있어요. 이노베이션 아카데미에서는 온갖 종류의 식물들을 재배하는 원예 수업과 미의 기준, 사교 에티켓 등을 가르치면서 컴퓨터와 핸드폰 사용은 금지했어요. 

지금 미나를 포함한 여학생들은 현장학습으로 연방화원의 장미 정원을 둘러보고 있어요. 우르릉 쾅, 하늘에서 천둥이 치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수업이 중단됐어요. 펜션트 교수는 학생 전원에게 버스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때 미나는 비를 맞으며 뭔가를 응시하고 서 있는 밸런타인 라이트를 봤어요. 평소 밸런타인은 모범생이라 미나와 친구들이 함께 놀자고 해도 번번이 거절해서 다가가기 힘든 친구예요. 근데 오늘은 뭔가 얼굴 표정이 없는, 섬뜩한 정적이 느껴졌어요.


"밸런타인. 괜찮아?"

"너도 저 소리 들려?"

"무슨 소리?"

"장미들."

"있잖아, 꽃들은 살아 있어. 모두 다. 자세히 들으면 한데 얽힌 뿌리 소리가 들려. 

뿌리는 하나야. 공동의 목적. 장미는 아름답지만, 그게 장미의 전부는 아냐."

"나는 아무 소리 안 들려.  그저 조용한 만족감?"

"꽃들은 만족하지 않아."

"기다리는 거야." 

"뭘 기다려?"

"깨어나기를."    (17-18p)


낯선 밸런타인의 모습과 이상한 말들 때문에 미나는 혼란스러웠어요. 보스 사감이 나타나자 밸런타인은 순식간에 완벽한 모범생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어요.

왠지 미나 혼자 공상에 빠졌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요.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애너리즈가 화장실이 급하다며 사정을 했고, 무서운 보스 사감도 어쩔 수 없이 주유소에 정차를 허락했어요. 학교에서 단 것을 금지한 탓에 미나는 현장학습을 나올 때마다 몰래 사탕을 사곤 했는데, 지금이 그 기회였어요. 주유소 건물 안 매점에서 사탕을 사는 미나에게 또래의 잘생긴 남자애가 말을 걸어 왔어요. 잭슨은 자신이 사탕을 사주겠다고 했고 미나는 기분이 좋았어요. 보스 사감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보스 사감은 미나에게 얼른 버스에 타라면서 거칠게 손목을 잡아끌었고 그 바람에 넘어져 무릎을 크게 다쳤어요. 잭슨이 말리려 다가왔지만 덩치 큰 사감이 저지했어요. 버스의 분위기는 흥분에서 두려움으로 변했어요. 사감은 교수진은 아니지만 매일 학생들을 감독했고, 미나에게 이렇게 포악하게 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미나를 포함한 여학생은 자신들을 보살피는 남자들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복종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지금까진 이런 적이 없었고, 다쳐본 적도 없었던 터라 미나는 혼이 나간 기분이었어요.

충동억제치료, 단순 계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 받는 벌이에요. 학교의 분석가인 안톤은 미나를 면담한 후 충동억제치료를 권했어요. 안톤은 미나를 위한 것이라고, 더 완벽한 소녀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미나는 벌 받기 싫었어요. 그다음 일은 별로 기억나지 않았어요.


<깨어난 장미 인형들>은 철책과 철문으로 둘러싸인 이노베이션스 아카데미 안에 갇혀 교육받는 소녀들의 이야기예요.

원제는 '날카로운 막대기를 든 소녀들'이에요. 

처음에 느꼈던 의구심이 점점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면서,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될 거예요. 늘 그렇듯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기억하는 게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

장미 정원에서 밸런타인이 했던 말처럼, 과연 꽃들은 깨어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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