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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안온한 날들 -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평점 :
남궁인 작가님.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라는 책을 썼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두 권 모두 읽지 못했어요.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매일 밤 응급실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 현장을 지키는 이의 목소리라니... 솔직히 읽을 자신이 없었어요. 이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장이니까.
실제로 응급실을 가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느낄 테니까. 그래서 책조차 피했던 것 같아요.
<제법 안온한 날들>
책 제목에 끌려 작가 이름을 보니, 앗!
이번 책 부제는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라서 안심이 됐어요. 읽을 수 있겠구나... 겁쟁이 같은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첫 페이지를 여니, 다음의 문장이 있었어요.
"너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야. 너는, 그냥 외로운 사람이야."
우리가 처음으로 입을 맞춘 뒤,
당신은 바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아하, 당신이라는 존재는 과거 사랑했던 그 사람이군요, 라고 짐작했어요.
책의 시작은 "나라에서 당신에게"라는 편지였거든요. 일본 긴키 지방의 시골 마을 나라에 머물던 저자가 1300년 전 궁궐터에 갔다가 그저 주춧돌과 기둥뿌리, 제단만 남은 황폐한 부지를 보았어요. 이 터만 남은 곳을 사람들은 왜 기억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 걸까요. 숙소로 돌아와 비좁은 침대에서 저자는 편지를 쓰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평범하게 사랑했던 옛사람들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믿는 지금 사람들이 떠올라, 저는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 제가 이 도시를 떠돌며 소원했던 것처럼 당신에 대한 마음이 계속 남아 당신을 그리워하게 되어,
당신이 나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각진 돌이 아닌 뭉툭하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주는 상상을 해요.
그걸로 저는 삶을 이어가야겠죠.
... 아, 1300년간 영속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내가, 사라지지 않을 견고한 모든 것을 떠올리며. 당신에게." (18-19p)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이 편지를 받게 될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편지를 읽으면서 마치 제가 쓴 편지마냥 '나만의 당신'을 떠올렸거든요.
가장 절박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당신.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라서, 그의 삶 중 상당한 부분을 응급실에서 보내고 있어요. 이 책이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저 혼자 단단히 오해를 했어요. 소설책이 아닌데...
네, 저자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응급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일상에서 마주했던 사랑이에요.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야기도 있고, 본인이 크게 다쳐서 의사인 자아와 나약한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도 등장해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응급실 이야기, 에휴... 읽다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죽기 위해 인간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죽음의 순간 하늘은 세금 따위를 부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죽기 직전까지 인간은 돈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이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 같지도 못한 죽음을 겪어야 한다.
죽음에 가격이 있다면, 그 죽음은 마치 무료에 가까운 금액으로 제공되는 가장 저렴한 죽음이 아닐까." (212p)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곳은 불행이 일렬로 지나가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77p)
"나는 죽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외에 누군가에게 더 알려줄 사실은 없다." (278p)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 심정지 환자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인 것 같아요.
어머니, 저자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네요. 어머니라서 가능한 기적.
제법 안온한 날들은, 온갖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것 같아요.
책을 덮으면서 제 머릿속에 남는 건 -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