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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
로버트 휴 벤슨 지음, 유혜인 옮김 / 메이븐 / 2020년 4월
평점 :
《세상의 주인》은 종교서적이 아니라 디스토피아 소설이에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3년과 2015년 두 번이나 추천했다는 바로 그 책.
그 이유는 사상적 세계화의 위험성을 묘사한 작품이기 때문이래요.
사.상.적.세.계.화
강대국의 지배적인 문화가 저개발국에 물질적, 세속적 세계관을 퍼뜨려 사상의 획일화로 이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대요.
놀랍게도 이 작품은 1907년 출간되었어요. 100여 년 전에 그려낸 미래 세계가 마치 예언서처럼 상당 부분 닮아 있다는 점.
또한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게》(1932), 조지 오웰의 《1984》(1949)보다 30여 년 먼저 세상에 나와 최초의 현대적 디스토피아 소설로 평가받는다는 점.
그만큼 선구자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작품 해설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서문보다 앞서 해설을 하고도, 책 말미에 부록으로 《세상의 주인》의 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어요.
물론 이 작품을 읽기 위해 해설을 꼭 봐야 할 정도로 난해한 내용은 아니에요.
오히려 저자 로버트 휴 벤슨이 1907년 케임브리지에서 쓴 서문만 읽어도 충분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책이 큰 파문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달게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다른 부분에 대한 비판도 환영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내가 바라는 원칙(또한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원칙)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다만 목소리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으려 했고,
최대한 다른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심정을 헤아리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장황한 프롤로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작품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하지만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필요한 부분은 아니다. " (14-15p)
와우, 1907년이라니!
2020년 지금 시점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가서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 같아요.
초고속 비행선이 등장하고, 지하 세계에서 인공 태양광으로 살아가며, 누구나 원하면 안락사를 선택하는 모습을 상상했다는 게 놀라워요.
저자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아들이자 촉망받는 성공회 신부였는데, 성공회 교리에 의문을 품고는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여 당시 영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라고 해요. 1904년 로마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케임브리지로 부임해 사목 활동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면서 《세상의 주인》을 집필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되네요.
어쩌면 그는 개종한 이후에도 비판적인 시각을 고수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세상의 주인》에서는 반그리스도교 세력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이야기예요.
세계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줄리언 펠센버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그가 세계를 장악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등장으로 인해 전쟁은 사라졌고, 모든 국가들이 그의 통치를 간절히 원했어요. 겨우 서른둘? 젊은 정치인 펠센버그의 이력은 미국 상원 의원에 당선됐고, 한두 번 연설을 한 후로 대표단에 뽑혔는데, 그의 연설이 뭔가 대중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초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인본주의가 실제 종교처럼 되어 버린 거예요. 그 중심에 펠센버그가 있고, 인간이 곧 신이 되는 범신론이 퍼지면서 펠센버그는 '사람의 아들'이자 '세계의 구원자'로 추앙받게 돼요.
이에 맞서는 인물이 가톨릭 사제인 퍼시 프랭클린 신부예요. 그는 마치 골고타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고통과 시련을 겪게 돼요.
'왜, 왜, 왜? 어째서 이 모든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가? 하느님은 어찌하여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215p) 라며 고뇌하는 퍼시 프랭클린 신부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에요. 신앙이란 한 점의 의심도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니까요. 그는 견디기 힘든 시련에 몸부림치면서도 끝내 주님의 길을 걸어가요.
반면 세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줄리언 펠센버그의 선택은...
솔직히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어요. 누가 나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선택을 강요한다면 어떨까라는. 퍼시 신부뿐 아니라 맨체스터 의원 올리버의 아내 메이블 역시 혼란을 겪는 인물이에요. 프랜시스 신부처럼 아예 변절하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 갈림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과연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아니 누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가.
온갖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혀서 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위기와 맞물려서 더욱 소름이 돋았던 것 같아요.
정해진 답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야 할 답.
퍼시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새기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의심이나 두려움이 남아 있다면 이 말을 들어 주십시오.
... 나는 주님의 눈을 가졌습니다.
이제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눈으로 보며 걸을 겁니다." (419-42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