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하지 못한 말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해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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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어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몰랐으니 괜찮다고 넘길 수 없는, 넘어가지 않는 뾰족한 가시들이 있네요.

누구든 꼭 말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삼켜야 했던 순간들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누군가 용기내어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한다면 꼭 들어야만 해요.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읽으면서 다시금 <괴물>이 떠올랐어요.

이런, 시인의 모습을 한 괴물 하나 잡아서 끝날 일이 아니구나.

괴물들이 저렇게 커질 동안 우리는 무얼 했나.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다함께 힘을 합쳐 잡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


사실 이 책은 최영미 시인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신문 잡지 등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모아 엮어낸 산문집이에요. 첫 번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이후 순탄치 않았던 시인의 삶.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이 살아온 삶의 궤적이 보였어요. 시인이기 이전에 인간 최영미로서 살기가 만만치 않았겠구나.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맞서 내 할 말을 하는 사람, 내 길을 가는 사람.

2017년 3월,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개정판이 12년 만에 출간되었는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에서 누락된 표현이 있음을 발견하고 속이 쓰렸다고 하네요.

소설 내용은 아버지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5·16 반혁명 사건'에 가담해 구속되며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시장에서 빵 가게를 차린 엄마에게 점심 도시락을 나르던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 하경의 70년대, 서울 변두리의 이야기라고 해요. 3년이 지난 지금 2쇄를 찍어 마지막 문장이 원래대로 복원되었을지 궁금하네요. 암튼 속이 쓰렸을 시인을 위하여, 멋진 마지막 문장의 완성을 위하여 누락된 '내겐 더'를 첨부하여 적어볼게요.


생성되고 잊혀지고 다시금 발굴된 과거도 지워지리라.

시간의 모래 위에 새겨진 낙서처럼, 해변의 발자욱처럼 이 밤이 지나면 파도에 씻겨질 것을......

스스로 할퀴었던 칼날을 세상 속에 그만 파묻고 싶다. 

내겐 더 흘릴 피가 없으니까.    
  
 (86p)


'내겐 더'라는 문장의 무게를 느꼈어요. 

언젠가 어느 기업의 연구원과 간부들을 상대로 진행한 강의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대요.


"원칙을 지키는 건 쉬워요. 그냥 (원칙을) 지키면 돼요.

그러나 타협은 어려워요." 

타협하면서도 망가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있으면 얼마든지 절충할 수 있다. 

자신을 지킬 자신이 있으면 악마하고도 거래하는 게 정치 아닌가.

세상에 내가 타협을 가르치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더 변해야 쓰겠다. 

   _ 2017.06.03   (109p)


절충은 곧 배신이며 타락이고, 원칙을 지키는 게 어렵지 타협은 쉬울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젊은 시인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타협을 말하게 되었네요. 한때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추악한 변신을 보면서 나와 다른 진영에도 옳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대요. 

즉 늘 옳은 쪽도 없고, 늘 틀린 쪽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철이 들었다는 말. 백번 공감했어요.

또한 도로시 파커의 시처럼 선과 악이 미친 격자무늬처럼 얽혀 있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때가 있다는 말. 역시 공감했어요.

그러나 결정적 순간이 있어요.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때. 흉터와 무늬를 구분해야 할 때.

다른 건 다 변해도 오직 이것만은, 변하면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어쩌면 "아무도 못한 말"은, 이미(Already) 했던 말이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던 말이 아니었을까요.

이 시대의 바른 목소리.

들리시나요?




괴물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황해문화> , 2017 겨울,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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