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매시슨 -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6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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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주로 방송국에서 보여주는 외화가 색다른 즐거움을 줬던 기억이 나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풍경 속에 외국인들이 등장하는데 우리말을 엄청 잘한다는... 물론 더빙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그 중에서 <환상특급>은 굉장히 놀라워서 거의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어요.

긴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짧은 에피소드가 여러 개 나오는 옴니버스였는데 각 내용들이 정말 강렬했어요.

기승전결로 끝나는 내용이 아니라 기승전까지만 보여준다고 해야 하나.

직접적으로 결말을 보여주지 않지만 짐작할 수 있어서 소름끼쳤어요.

그래서 두고두고 그 내용들이 뇌리에 남았던 것 같아요. 

장황하게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전부 <환상특급>의 원작자 때문이에요.


리처드 매시슨 Richard Matheson

(1926년 2월 20일 ~ 2013년 6월 23일)


스티븐 킹과 더불어 현대 호러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라고 해요. 

바로 그의 작품들이 1960년대부터 영화와 TV드라마로 확장되면서, 작가 본인이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네요.

『나는 전설이다』는 출간 이후 2007년까지 세 차례나 영화화되었고, 단편들은 드라마 <환상특급>의 에피소드로 각색되었다고 해요.

우와, 리처드 매시슨의 원작이라니... 

그걸 여태껏 몰랐냐고 묻는다면 진짜 할 말이 없네요. 만약 진즉에 알았더라면 당연히 꼭 읽었을 거예요.

SF영화와 호러영화를 즐기면서도 깊이가 부족했네요. (반성모드)

솔직히 스티븐 킹의 작품만 읽었기 때문에 미국 호러 문학의 대가는 스티븐 킹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호러 장르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내 이름을 언급한다.

하지만 리처드 매시슨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 스티븐 킹    (629p)


휴우,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군요.

<환상특급>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원작자 리처드 매시슨이라는 언급만 있었다면 분명 그 이름을 기억했을 거예요.

마치 무슨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듯이 『리처드 매시슨』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환호했어요. 이것이 SF 호러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중 서른여섯 번째 책이에요. 작가의 이름을 책 제목으로 정한 건 탁월한 선택인 것 같아요.

아마도 이 책을 읽고나면 리.처.드.매.시.슨 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 없을테니.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뭐, 사실 이미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작품들이라서 낯설지 않았던 것 같아요.

<피의 아들>이나 <시체의 춤>에서 묘사된 장면들은 짧지만 강렬하게 상황을 압도해요.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섬뜩한 설정이라서.

<죄수>에서는 한 죄수가 자신은 존 라일리가 아니라 필립 존슨이라고 주장해요. 그러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희망이 없어." 그가 말했다. 
"희망이 없어. 아무도 날 믿어 주지 않아. 아무도."
  (282p)


사람이 느끼는 극한 공포는 뭘까요. 

리처드 매시슨이라는 작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정확하게 또한 예리하게 자극하고 있어요.

피를 철철 흘리며 달려드는 좀비나 괴생물체는 일종의 장치일 뿐이지 공포의 본질은 아니에요.

어쩌면 그러한 끔찍한 대상들은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감당할 여지가 있어요. 보이는 적이니까.

그러나 철저한 고립, 완벽한 배신으로 혼자가 된다면 어떨까요.

세상에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는다면...

<죄수>의 경우처럼 죄수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죄수가 자신을 라일리가 아닌 필립이라고 믿는다는 게 중요하죠.

<2만 피트 상공의 악몽>의 주인공 윌슨도 죄수와 다르지 않아요. 오직 혼자만 아는 진실은 악몽이에요.

뜬금없지만 근래 TV드라마 <부부의 관계>에서 주인공 지선우가 남편의 불륜보다 더 경악했던 건 자신만 빼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는 거예요.

매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이웃과 동료,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가짜라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과 공포.

그들 전부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은 곧 나에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의미인 거니까.

흔히 SF영화나 공포영화에서 무서운 장면들은 대부분 나와는 무관한 설정이기 때문에 좀 놀라긴 해도 소름돋게 무섭지는 않아요.

반면에 평범한 일상을 파고드는 의심 혹은 배신은 엄청난 파급력이 있어요. 나도 예외는 아니라는,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훨씬 상상하기 쉬워요.

신기한 건 리처드 매시슨의 단편들은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기괴한 상황인데도 묘하게 감정이입이 된다는 거예요. 그의 능력이겠죠.

리처드 매시슨이 선사하는 공포는 한 번에 확 터지는 폭탄이 아니라 서서히 퍼져나가는 독가스 같아요. 다 읽고나서도 긴 여운을 남기죠.

절대로 함부로 열지 마세요. 감당할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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