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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 - 메마르고 뾰족해진 나에게 그림책 에세이
라문숙 지음 / 혜다 / 2020년 3월
평점 :
그림책들의 주인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위해서 읽어줬고, 아이가 읽으니까.
며칠 전에 박스에 넣어둔 그림책을 꺼냈어요. 책장 정리를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미뤄 두었던 그림책 박스.
오랜만에 그림책을 펼치니 색다른 기분이 들었어요. 온전히 나를 위하여 읽는 그림책.
사실은 그림책을 치워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 망설였는데 그림책을 펼친 순간 알게 됐어요.
이 그림책은 나를 위한 거였구나...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은 라문숙 작가님의 그림책 에세이예요.
"... 오래 잊고 있었던 그림책도 다시 펴보기 시작했다.
... 나는 텅 빈 집안에서 서성이며 내 마음대로 그림책을 읽었다.
그림 너머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몇 글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 뒤에 가려진 마음들을 읽었다.
나는 그림책 속 아이가 되었다가 여우가 되었다가 트랙터가 되기도 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앞에 서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기도 했고
책 속의 토끼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며
외할머니의 주름살을 그리워하기도 했다.
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긴 그림책을 어느 날엔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읽기도 했다." (8-9p)
신기했어요. 저자의 이야기가 딱 내 마음 같아서.
다만 그림책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에 그친 나와는 달리 저자는 그림책 속 여백을 자신의 이야기로 채워갔네요.
바로 이 책을 통해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잃어버린 영혼, 나 하나로는 부족해, 가만히 들어주었어, 곰씨의 의자, 느끼는 대로, 날 좀 그냥 내버려 둬, 도서관,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씨, 이렇게 멋진 날,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밀크티, 리디아의 정원, 달 샤베트, 수영장 가는 날, 엄마, 거리에 핀 꽃, 엄마 마중, 공원을 헤엄치는 붉은 물고기, 모네의 정원에서, 할머니의 찻잔, 비 오는 날의 소풍, 내가 함께 있을게.
이미 읽었던 책은 내용을 알기 때문에 다시 읽는다고 해서 감상이 크게 바뀌지는 않아요. 그런데 그림책은 다른 것 같아요.
그림책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특별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아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혹은 시계 든 토끼처럼.
"화가 윤석남의 그림책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바로 내가 지나온 그 답답했던 시절을 상기시켰다.
내 얘기가 여기 왜 있나 싶었다.
... 나도 자루 속 여자처럼 긴 터널을 통과해 왔으니까.
길고 어두운 터널 끝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것들, 혹은 사람들은 무엇이고 또 누구인가?
... 다정한 세상에서 다정한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는 꿈을 꾼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다정할 것, 이제 내 방을 다정한 방이라 부른다." (106-108p)
순수한 아이들이 마음으로 읽는 그림책이라서, 지치고 약해진 어른 아이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따뜻하고 행복해지는 그림책들.
누구나 그 그림책들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진심으로 원한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