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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주제 사라마구 지음, 박정훈 옮김 / 해냄 / 2020년 2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어요.
아버지의 부고.
슬픔에 잠겨있을 친구에게 무슨 말을 전해야할 지 몰라서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어요.
단 몇 줄로 기록된 한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름 석 자와 나이, 가족들의 이름이 전부였어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족들과 어떤 추억을 쌓았는지, 마지막은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만약 나라면, 나는 그 마지막을 어떤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아니 내게는 어떤 기억들이 남게 될까...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읽은 후, "너였던 소년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두거라."라는 문장이 가슴 속에 들어왔어요.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은 주제 사라마구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아낸 회고록이에요.
우선 주제 사라마구는 누구인가.
1922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그는 1998년 95번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예요.
이 책은 2006년 발표되었고, 주제 사라마구는 2010년 여든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요.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07년 여름 멕시코시티 중심가에 위치한 북 카페에서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스페인어판을 처음 접했다고 해요.
스페인어판은 문고판 크기의 책이라서 무척 가볍고 얇아서, 배낭에 넣고 휴가를 가서 해변가에 누워 사나흘 만에 읽었더라는 그 책.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2020년 한국어판으로 출간되었으니, 옮긴이에게도 이 책은 작은 기억,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일 것 같아요.
저한테는 소설이 아닌 작가의 진짜 삶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장 순수했던 영혼의 시간들.
"오직 나만은 알고 있었다. 운명의 해독 불가능한 페이지에,
우연의 맹목적인 구불구불한 길 위에 나의 탄생을 마치기 위해서는
아지냐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쓰여 있다는 것을.
비록 알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13p)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라고 표현했듯이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의 기억들을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고 있어요.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는 운명의 장난 같아요. 사라마구는 원래 아버지의 성이 아니라 마을에서 아버지 집안을 부르던 별명이었대요.
어떻게 별명이 성으로 둔갑했느냐 하면 당시 담당 공무원이 술에 취한 채 출생신고를 접수하면서 '주제 드 소자'라는 이름 뒤에 사라마구를 추가했던 거예요.
출생신고를 했던 아버지는 물론 가족들은 아무도 몰랐대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출생신고서를 제출할 때 그 엄청난 실수를 발견했대요.
아버지는 시골뜨기를 연상케 하는 별명인 사라마구를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격노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성이 다르다니...
관청은 이 모든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방법을 아버지에게 통보했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성명을 재등록하는 절차를 밟았어요.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이름도 '주제 드 소자 사라마구'가 되었어요. (이런, 책에서 이부분이 '사마라구'라고 틀리게 인쇄되었네요. 의도한 건 아니겠죠?)
아들이 아비에게 성을 준 유일한 사례일 거라는 작가의 말처럼, 세상 일이란 참으로 희한한 것 같아요.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을뿐더러, 대부분 내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갈 때가 많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일뿐이에요.
바꿀 수 없는 기억들인데 한편으론 바뀌기도 해요. 기억에 대한 감상은 세월과 함께 변하는 것 같아요.
"세월이 많이 흘렀다. ... 여러 부질없는 행위에도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에 언젠가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래 맞아, 너는 언제나 좋은 아들이었어!
그 순간에 그의 모든 걸 용서했다.
그 이전에는 우리가 그렇게 가까웠던 적이 결코 없었다." (22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