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없는 세계
미우라 시온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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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없는 세계>는 미우라 시온의 소설이에요.

왠지 익숙한 작가 이름이라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을 읽었더군요.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주 작고 특별한 보석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작가인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는 제목부터 과감한 것 같아요. 

사랑 없는 세계라니, 살짝 실망할 뻔 했는데 어머나, 놀라운 것이 숨어 있었네요.

바로 식물학, 식물의 세계!


후지마루는 요리에 빠진 남자예요. 조리전문학교를 졸업 후 이탈리아 식당에 취직했지만 스스로 찾은 맛집 '엔푸쿠테이'라는 작은 식당에서 일하기 위해 퇴직했어요.

이 식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후지마루의 혀와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에요. 

허름한 외관과 식당 주인 쓰부라야 쇼이치의 무뚝뚝함에도 불구하고 맛이 기대 이상이었어요. 정성껏 만든 마음이 전달되는 깊이가 있고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

가격도 적당하고 요리사로서의 기개와 실력이 느껴져서, 후지마루는 쓰부라야를 요리 스승으로 모시게 됐어요. 아예 식당 2층에 입주하게 된 건 쓰부라야가 꽃집 사장 하나 씨의 집에서 동거하게 된 덕분이에요. 워낙 요리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후지마루는 쓰부라야의 구박에도 주눅들지 않아요. 말만 그렇지, 쓰부라야는 식재료 다듬기뿐 아니라 소스 만드는 것을 돕는 일 등을 하게 해주거든요. 또 끼니 때마다 뚝딱뚝딱 맛난 요리를 해줘요. 요리 바보 후지마루는 휴일에도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거나 자기 방에서 음식 만들기에 열중하느라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요.

어느날 쓰부라야가 하늘색 자전거를 가져왔어요. 뒷바퀴 위에 세로로 긴 은색 상자가 장착된 자전거는 라면집 배달 오토바이를 닮았어요. 

엥? 뜬금없이 자전거로 음식 배달까지 하게 된 거예요. 평소 단골 손님이 많던 식당이라서, 과거 쓰부라야의 아버지가 주인일 때는 쓰부라야가 배달 담당이었대요.

지금은 오토바이 면허가 없는 후지마루뿐이니 자전거 배달이 된 거죠. 


T대학 대학원 이학계 연구과 생물학과 전공 (자연과학부 B호관 361호)

교수 마쓰다 겐자부로


점심 때 종종 오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십대 중반의 남자, 그가 준 명함에 적힌 내용이에요. 앞으로 배달 주문하면 그쪽으로 와달라고 말이죠.

다음 날 12시쯤, 식사 배달을 해달라는 전화가 왔고, 후지마루는 처음으로 T대학 자연과학부 B호관에 들어가게 됐어요.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였어요. 후지마루보다 한두살 위, 이십대 중반 정도?  

검은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안경을 낀 티셔츠에 청바지, 거기에 고무 슬리퍼를 신은 그녀는 모토무라예요.

연구실 안에는 마쓰다 교수와 젊은이 넷이 보였어요. 연구원과 대학원생들로 식물학을 연구하고 있어요.

몇 번쯤 연구실에 드나드는 사이, 후지마루는 조금씩 모토무라 일행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어요. 

후지마루는 식물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들을 모토무라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설명해줬어요. 

모토무라는 애기장대라는 식물의 잎을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잎사귀를 현미경으로 보면서 세포의 개수를 세는 일을 한다고 했어요.

궁금해 하는 후지마루에게 현미경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줬어요. 우아, 신기해서 소리쳤어요.

현미경 렌즈 너머로 투명한 조각 퍼즐 같이 잎 세포가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야생형 애기장대와 변이가 된 애기장대인데, 세포 여기저기에 작은 가시가 튀어나와 있어요. 세 갈래로 나뉜 가시가 안테나 같기도 하고, 외계인의 머리 같기도 했어요.

그로부터 겨우 5분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마치 아른거리는 꿈속에 있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작은 잎사귀 안에 초롱초롱 펼쳐져 있는 세포의 우주. 

후지마루가 지금까지 요리해온 채소와 고기, 생선 속에도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던 거예요.

모토무라는 작은 잎 안에 세포가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은하, 바로 그 세계에 빠져 있는 여자였어요.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버린 후지마루는 사흘 뒤 연구실에서 모토무라에게 답변을 들었어요.


"식물에는 뇌도 신경도 없어요. 그러니 사고도 감정도 없어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왕성하게 번식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환경에 적응해서

지구 여기저기에서 살고 있어요. 신기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그래서 저는 식물을 선택했어요. 

사랑 없는 세계를 사는 식물 연구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누구하고든 만나서 사귀는 일은 할 수 없고, 안 할 거예요."  (96p)


정말정말 후지마루에겐 미안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후지마루의 로맨스보다는 모토무라의 식물 연구에 관심이 갔어요.

현미경으로 보는 애기장대 세포들... 아름답고 쓸쓸한 은하라고 표현했던 그 세포들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아하, 문득 중학생 시절에 처음 생물학을 배우면서 설레고 좋았던 감정이 떠올랐어요. 어쩌면 모토무라처럼...

그리고 지금은 후지마루의 심정으로, 전혀 상상도 못한 감정을 샘솟게 하는 이야기 덕분에 신기하고 행복했어요.

식물과 그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좋아졌어요. 역시 살아 있는 한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야생 애기장대는 가장자리가 매끄러운 데 비해 변이된 애기장대는 삐죽삐죽하거나,

잎사귀 자체가 가늘고 길거나, 거꾸로 원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어요."

록울에는 각각 작은 팻말이 꽂혀 있었다. 야생 애기장대나 변이 애기장대 중 어느 쪽을 키우고 있는지 식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토무라가 잎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주자, 후지마루는 트레이에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오, 정말이다. 잎사귀가 방금 나온 건데도 모양이 많이 다르네요."

"유전자의 아주 작은 차이로 모양이 달라져요. 하지만 어느 것이 뛰어나고 어느 것이 열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모두 애기장대고, 다 챔버 안에서 잘 살아가려고 해요."
"우리랑 같군요......"

후지마루는 중얼거렸다. 얼굴 생김새나 체형이나 피부색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더 잘 살아보기 위해 하루하루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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