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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지음, 황석희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소년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뭔가 서툴고 불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나도 모르게 숨죽이며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을 펼친다면 소년의 이야기를 외면하기는 힘들 겁니다.
왜 그런지 따질 겨를도 없이 소년의 감정 속으로 빨려들어갈테니...
다 읽고 나서야 제목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롱 웨이 다운 Long way down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각을 확인했습니다.
오전 09:08:02
소년의 이야기를 듣느라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소년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겨우 열다섯 살.
이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소년이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해진 룰이니까.
그러니 소년은 그 룰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소년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습니다.
째각째각 초침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숨막히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소년의 이름은 윌.
정확하게는 윌리엄 홀로먼이지만 형 숀이 놀릴 때 이외에는 그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숀이 장난치며 놀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숀은 그 날, 바로 그저께 총에 맞았고, 죽었으니까.
총성이 들렸고, 뒤이어 비명 소리가 들렸으며 수많은 사이렌이 울려댔습니다.
소년의 동네에서 총성은 모든 사람의 귀와 눈을 멀게 합니다. 특히 누군가 죽었을 때는, 그럴 때는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사람들에게 물어봤자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8층으로 돌아온 소년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베개를 머리에 얹고 눌렀습니다. 엄마가 흐느끼는 소릴 눌러보려고.
울 것 같은 기분이지만 우는 건 안 됩니다. 룰에 어긋나니까. 지켜야 하는 룰이니까.
룰 No 1 : 우는 것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마라.
룰 No 2 : 밀고하는 것
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마라.
룰 No 3 : 복수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
살해당했다면
그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내어
죽여라. (31-33p)
책 표지에 보이는 동그란 버튼 위에 숫자가 보이나요?
엘리베이터 안에 층수를 나타내는 저 버튼을, 소년이 손을 뻗어 누를 땐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하얀 불빛이 검은 화살표를 둘러싸며 점점 아래로 내려갑니다, 내려갑니다, 내려갑니다, 내려갑니다...
L 버튼은 로비(Lobby)인데, 소년은 어릴 때 형 숀과 함께 빈 엘리베이터에 타면 누군가 들어와 L 버튼을 눌러주길 기다렸습니다.
누가 그 버튼을 누르면 두 형제는 키득거렸습니다.
우리에게 L은 "루저(Loser)"를 뜻했기 때문에 우리는 승자가 되어 로비까지 즐겁고 당당하게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금목걸이를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타서 L 버튼이 눌렸는지 확인할 때 소년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와 숀의 세상에선 내가 이미 루저 역할을 택했다는 걸 그 사람도 알고 있을까?' (75p)
소년은 세 번째 룰을 지키기 위해 지금 가고 있습니다.
오전 09:09:09
나가고 싶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담배 연기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내게서도 성난 파도처럼
빠져나갔다.
내가 숨을 돌릴 때
...
이젠 L 버튼에
불이 꺼져있었다. (304p)
어쩌면 처음부터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짐작했던 그것.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가슴 졸였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소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이 소설은 이상하리만치 글밥이 많지 않습니다. 망설이며 고민하는 소년의 마음처럼.
페이지마다 빈 여백은 거친 벽면 같기도 하고 깜깜한 밤 같기도 합니다.
첫 페이지에 철창 엘리베이터 문이 보입니다.
자, 내려갈 준비가 되었나요?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참혹한 순간들이 째각째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