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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달님만이
장아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평점 :
어릴 적 읽던 전래동화에는 호랑이가 많이 등장했어요. 사람을 잡아먹는 못된 호랑이부터 효심을 아는 착한 호랑이까지 성격도 다양했어요. 그만큼 과거 우리 조상들에게 호랑이는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아요. 백두대간이라는 고유의 지형 덕분에 산에는 호랑이가 살았고, 사람들에게는 그 호랑이가 경외의 대상이었던 거죠.
안타깝게도 지금 산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아요. 그깟 무서운 호랑이 없는 게 낫다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간 우리 땅에서 벌어진 불행한 역사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래 터전에서 쫓겨나고 몰살된 호랑이들처럼 우리의 정기가 함부로 짓밟힌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요.
<오직 달님만이>는 어느 섬에서 벌어진 이야기예요. 지금껏 봐 왔던 호랑이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게 그려진 것 같아요.
이 섬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노래가 있었어요.
"옛날 옛적 한 소녀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바다를 건너오니."
"그 섬에도 그리하여 범의 자식들이 살게 됐도다."
"그 섬에도 그리하여 범의 자식들이 살게 됐도다."
"범의 범의 범의 그 범의 자식에게 인간 소녀가 점지되니."
"그는 성신에게서 비밀을 전해 듣지."
"그러나 그 연정은 가시밭길을 걸으리니 낙타 머리에 사슴뿔을 달고
뱀의 목을 한 괴물이 피를 빌려 마시리라." (170-172p)
주인공 모현은 열아홉 살 소녀예요. 지금 형부 단오에게 이끌려 산을 오르고 있어요. 단오는 서른여섯이며, 모현의 언니 희현의 남편이자 두 남매의 아비이기도 해요.
오랏줄에 묶인 모현은 비단 치마에 족두리를 쓰고 있어요. 어여쁘게 꾸민 신부 복장으로 한밤중에 산을 오르는 연유가 무엇인고 하니, 모두 범님 때문이에요.
무당 천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간 벌어진 흉흉한 일들은 검은산에 머물며 우리를 보살피시는 범님을 화나게 했기 때문이라면서 마을의 여자를 범님께 바쳐야 한다고 했어요. 첫 번째 호랑이 신부는 과붓집 둘째 딸로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요. 그뒤 여자 둘이 더 희생됐고, 네 번째 신부로 선택된 사람은 희현이었어요. 그때 희현이 울부짖으며 아직 젖도 떼지 않은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다고 했어요. 남편 단오는 열다섯 살이나 어린 아내에게 닥친 위기를 방관하기만 했어요. 희현은 곁에 있던 모현을 붙들고 속삭였어요.
"나는 네게 마지막 남은 피붙이지? 그렇지, 모현아?"
"나를 죽게 버려두지 마. 너는, 너만은 그러면 안 되잖아.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지켜왔는데. 알잖아."
"네게는 내가 하나뿐인 혈육이잖아. 허나 저길 봐. 나한테는 아이가 있어. 혼인도 했지.
그렇지만 모현아, 너는 혼자지. 나밖에 없지. 살려줘. 이대로 놓아버리지 마.
저 아이들을, 네 식구들을. 이렇게 부탁할게." (42p)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어요. 젖먹이 아이를 둔 엄마의 절절한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이 살겠다고 하나뿐인 동생에게 죽기를 부탁하다니.
모현은 결국 언니를 대신해서 산군님의 신부를 자청했어요. 언니 희현은 마지막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유품인 목장도를 전해주었어요. 모현은 아무도 모르게 목장도를 숨겼어요.
첫 장면이 바로 형부 단오가 길잡이로 나서서 모현을 끌고 산에 오르는 모습이에요. 오랏줄을 당기는 단오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것이 처제 모현에 대한 동정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에휴, 여기서 분노가 막 치밀어서 심호흡이 필요해요. 단오, 이 놈은 정말 짐승만도 못한 나쁜 XX 였어요. 모현에게 너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누구 손에 닿은 들 무슨 상관이냐면서 제 더러운 욕망을 풀겠다며 덤벼든 거예요. 모현은 사력을 다해 발길질하며 벗어나려 했고, 단오는 우악스럽게 모현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 했어요. 모현은 허리춤에 숨겨둔 칼을 꺼냈어요. 덩치가 큰 단오에게 밀려 넘어진 모현은 꼼짝할 수 없었고, 발버둥질하던 모현은 단오의 팔뚝을 꽉 물었어요. 그때 웬 짐승의 울음소리가 숲 속에서 들려왔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단오가 손찌검하려는 듯 왼손을 치켜들었을 때, 산안개 속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그것의 형체가 단오의 들린 손을 물어뜯었어요.
호랑이, 진짜 호랑이가 나타난 거예요. 호랑이가 단오를 덮쳤어요. 으아악!
모현은 도망쳤어요. 뒤따라 온 호랑이와 대치하게 된 모현은 칼을 휘둘렀으나 한 발짝 물러서며 신음을 토했어요. 호랑이가 모현의 오른 어깨를 물고 있던 까닭이었어요. 그 순간, 기이하게도 모현의 귓가에 낮고 그윽한 남자의 음성이 울려 퍼졌어요.
"그대였어. 그대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지. 잘 왔다, 소녀야. 이로써 예언은 이루어졌으니." (25p)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져요.
산군님의 신부가 되어 죽은 줄 알았던 모현은 놀랍게도 고을 수령인 홍옥 나리가 업고 내려왔어요. 홍옥은 호랑이를 잡으러 산에 갔다가 실종되어 모두가 죽었다고 여겼는데, 혼절해 있는 모현을 발견하여 함께 마을로 돌아왔으니 정말 기이한 일이죠.
과연 모현에게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다음이 궁금해지는 <오직 달님만이>는 구전설화 못지 않은 흥미로운 전개가 특징이에요.
다 읽고나서야 범님의 존재 의미를 생각했어요. 한 소녀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 바다를 건너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 민족 정기에는 호랑이의 정신이 깃들었음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