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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빙이 녹기까지
권미호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10월
평점 :
버스 창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무엇을 꼭 보기 위한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눈앞에 놓인 장면을 볼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상황이죠.
물론 눈을 감아버리는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감고 싶지 않다면 보이는 것들을 봐야 해요.
보이는 것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권미호 작가님의 <유빙이 녹기까지>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어요.
짧은 단편은 쉽게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읽고 난 후가 문제예요.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요.
덜 닫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찬 바람처럼 뭔가 자꾸 마음 한 켠을 서늘하게 하네요.
<오늘 줄서기>는 줄서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휴학생인 '나'의 어떤 하루 이야기예요. 나이키 한정판 매물이나 애플사 핸드폰과 같은 최신 기종의 제품부터 사립유치원 추첨권까지 줄을 서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아요. 자신의 라인에 직접 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돈만 지불하면 줄서기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어요. '슬라임'으로 부르는 그 남자는 한 손에 '액체 괴물'이라고 불리는 슬라임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에요. 그는 내 손에 자신의 명함을 쥐여 주었어요.
'무엇이든 대신 서 드립니다.'라는 문구와 핸드폰 번호, 웹사이트 주소가 적혀 있는 명함.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고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연락 주세요. 서길 원하든 서 주길 원하든." (17p)
오늘 '나'의 줄서기 장소는 나이키 매장 앞이에요. 유명한 디자이너와 컬래버레이션으로 만들어지는 운동화, 전 세계 소량 한정 발매라서 나이키 플래그쉽 스토어에서만 판매가 진행되기 때문에 라인 따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슬라임 같이 주선해 주는 매니저가 따로 생긴 거예요. 밤샘 줄서기를 버텨내고, 오전 여덟 시에 선배에게 전화가 왔어요. 정교수의 논문 제출 시한이 오늘인데, 하필 선배가 지문등록을 해놓지 않아서 연구실 중앙 컴퓨터에 있는 논문 자료를 볼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나 외에는 열람 가능한 조교가 없으니 얼른 오라는 호출이에요. 등록금 납부 마감일도 오늘이에요. 오늘 줄서기를 성공해야 부족한 등록금을 채울 수 있어요.
슬라임에게 급하게 SOS를 쳤더니 라인맨들의 땜빵 전문인 땜빵이 왔어요. 슬라임이 주선하는 라인은 확실했고, 그는 어떤 문제든 해결능력이 뛰어나서 사안이 중요할수록 의뢰인, 라인맨 모두 그에게 몰려들었어요. 땜빵은 조용히 내 귓가에 속삭였어요.
"주선자 너무 믿지 말어...... 믿지도 말고, 척지지도 말고." (26p)
가족이라고는 함께 살기 힘든 엄마밖에 없는 '나'는 서울에 혼자 올라온 택주와 형제처럼 의지하며 지냈어요. 그래서 뉴질랜드 교환학생의 기회를 택주에게 양보했던 거예요. 복학하고 나서야 그 기회가 천금 같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다리를 저는 택주는 군 면제라서 내가 입대한 사이에 뉴질랜드로 떠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복학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요. 택주는 뉴질랜드까지 가서 뭔가를 깨달았다는데, 그러면 '나'는? 나도 일단 그곳에 가봐야 공평하잖아요. 결국 깨닫는 데도 돈이 필요해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오늘 줄서기가 불안하기만 한데, 그때 그 상황에 절묘하게 나타난 슬라임은 놀랍게도 뚫린 라인을 지나 줄을 서 있는 마지막 사람 다음 차례에 나를 데려갔어요.
"뭐해, 돈 필요하지 않아?" (33p)
소름이 돋았어요. 오로지 거래 성공을 목표로 언제나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슬라임이라는 존재가 낯설지 않아서.
슬라임이 버리고 간 슬라임, 액체 괴물을 바라보던 '나'는 마구 밟아대며 계속, 작게, 중얼거렸어요.
"돈 니드 워터...... 돈, 니드...... 돈, 니드...... 니드...... 니드......" (36p)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긴 한숨을 내뱉었어요.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다시, 줄을 설 시간이다." (36p)
이보다 더 현실적인 비유는 없을 것 같아요. 줄서기는 실제이면서 실재라는 점.
일곱 편의 단편 중에서 <오늘 줄서기>가 나의 시선을 가장 오래, 깊이 붙잡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