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꽃 ㅣ 알비 문학 시리즈 3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김대영 그림, 문유림 옮김 / 알비 / 2019년 9월
평점 :
샤를 보들레르.
아는 건 그의 명성뿐.
정작 그의 시(詩) 한 편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그는 누구이며, 어떤 시를 썼는가.
이미 국내에 출간된 <악의 꽃>은 여러 권 있습니다.
출판사마다 번역과 구성이 달라서, 제목만 빼면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 어떤 <악의 꽃>을 읽느냐는 각자 자유롭게 선택하면 됩니다.
중요한 건 지금 내 손에 있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 이 내게는 처음이라는 것.
희한하게도 <악의 꽃>이라는 제목이 낯설지 않습니다. 보들레르의 명성 때문이 아니라 단어의 조합이 그렇습니다.
'악'과 '꽃'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왠지 그냥 '악의 꽃'이 존재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니 '악'은 흉칙한 모습이 아니라 곱디고운 꽃으로 보일 수도... 모든 인간들이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악마에게 속지 않았겠지만.
이 책은 '악의 꽃' 재판 126편과 '새 악의 꽃' 16편, 총 142편의 시 가운데 대표적인 20편의 시를 선정했다고 합니다.
제목이 없는 시는 첫 행을 제목으로 하였고, '*'로 표시했으며 시마다 독자의 해석을 돕기 위해 역자(문유림님)의 짧은 시평을 수록하였습니다.
또한 책표지를 비롯하여 각 시마다 고양이 그림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길 위 고양이들을 그렸다는 김대영님의 그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룹니다.
솔직히 보들레르의 시가 얼마나 훌륭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생애를 알고보니 시 속에서 보들레르가 보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길 희망했으나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길 바랐던 의붓아버지의 반대와 억압으로 삐뚤어진 그는 수많은 재산을 탕진하다 가족에 의해 금치산자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그의 시는 대담하고 거침없이 새로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1857년 처음으로 출판된 '악의 꽃'은 과감한 주제와 선정성을 이유로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하고 벌금형을 물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후 유죄선고 받은 6편의 시를 제외하고 다른 시들이 추가된 2판이 출판되었습니다.
1949년 5월 11일, 보들레르를 옹호하던 많은 유명인사로 인해 보들레르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삭제되었던 6편의 시가 다시 프랑스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노와 인내로 쓰인 책입니다.
게다가 이 책의 긍정적인 가치의 증거물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악(惡) 안에 있습니다.'
- 샤를 보들레르 (153p)
아하, 바로 악!
그때는 불건전하다고 비판받던 시집이, 지금은 예술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건 거짓이 아닌 진실이었으니까. 보들레르 자신의 삶에서 끌어올린 시였으니까, 라고 추측해봅니다. 유죄선고 받은 6편의 시를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 겨우 스무 편의 시만 읽어봤기 때문에 보들레르의 영혼까지 느끼진 못했다고 핑계대고 싶습니다. 다만 작은 떨림은 느꼈습니다. Rest in peace !
목소리
La voix
나의 요람은
책장 뒤편에 기대어 있었다.
소설과 과학책과 우화집과
라틴의 재와 그리스의 먼지가 한데 섞인
어두운 바벨탑에.
내 키는 이절판지 책만 했다.
두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첫 목소리는 확신에 찬 투로 능글맞게 말하길.
"이 '땅'은 달콤함으로 가득 찬 케이크야.
나는 네 식욕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어.
(그러면 네 기쁨은 끝나지 않겠지!)"
두 번째 목소리는 말하길
"와라! 꿈속을 향한 여행으로,
가능성의 너머로, 아는 것들의 너머로!"
첫 목소리는 모래사막의 바람처럼 노래했다.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없는 이 구슬픈 유령의 소리는
귀를 달콤하게 어루만지면서도 두렵게 했다.
나는 두 번째 목소리에 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친절한 목소리여!"
아아! 이날을 내 눈물과 불행의 시작이라 칭할 수 있다.
끝없는 존재의 장식품 뒤에서,
심연의 가장 검은 곳에서,
세계의 기이함을 또렷이 보고,
이 황홀한 통찰의 희생물로서
나는 내 신발을 문 뱀들을 끌고 다닌다.
이때로부터 나는,
선지자처럼
사막과 바다를 뜨겁게 사랑하며,
상중에 웃고 축제에서 울며,
가장 쓴 술에서 단맛을 찾고,
너무나 자주 사실을 거짓으로 여기고,
하늘에 눈을 고정하다 구렁에 빠진다.
하지만 그 '목소리'
내게 위로하며 말하길
"네 몽상을 지켜라.
바보보다 아름다운 꿈
현명한 자는 가지지 못하리니!" (76-8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