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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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에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멈추기에 늦은 상태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내 운명은 그리스의 비극처럼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63p)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앨리샤 베런슨의 일기장... 

그녀는 남편 가브리엘 베런슨이 죽은 현장에서 손목을 칼로 그은 채 서 있었습니다. 기묘하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얼어붙은 것처럼.

가브리엘은 발목과 손목이 의자에 철사로 묶여 있었고, 얼굴에 여러 차례 총상을 입어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앨리샤의 발 앞에 칼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고, 가브리엘을 쏜 총에는 앨리샤의 지문뿐이었습니다.

앨리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는 경찰관에게 저항했고,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으나 목숨은 건졌습니다.

다음 날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에게 경찰이 변호사와 함께 찾아와 심문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체포당하는 순간부터 앨리샤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계속되는 침묵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


"남편을 죽였을 때 앨리샤 베런슨은 서른세 살이었다."   (17p)

병원에서 퇴원해 재판을 앞두고 자택에 구금된 그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자화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캔버스의 왼쪽 아래 구석에 옅은 파란색으로 그리스어 제목을 붙였습니다.


 

"알케스티스"


 

 

자화상인 그림 속에는 앨리샤가 살인이 벌어지고 난 뒤 집에 있는 작업실에서 이젤과 캔버스를 앞에 두고 손에 붓을 든 채 벌거벗고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붉은색 긴 머리칼이 깡마른 어깨 위로 흘러내리고, 반투명한 피부 속에는 푸른색 혈관이 드러났으며, 양쪽 손목에는 흉터가 생생하게 보였습니다. 앨리샤의 손에 쥔 붓에서는 붉은 물감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입을 벌리고 있으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습니다.


상황은 앨리샤가 가브리엘을 죽였다는 걸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나 왜 남편을 죽였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았습니다.

법정에서는 심신미약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고, 앨리샤는 그로브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하고 거의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앨리샤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테오 파버다. 마흔두 살이다.

그리고 나는 정신에 문제가 있었기에 심리상담가가 되었다."  (28p)


앨리샤 사건이 벌어질 당시에 테오는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앨리샤 베런슨의 미스터리와 그녀의 계속되는 침묵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이었고, 심리상담가로서 그녀를 고치고 싶은 열망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6년 만에 그로브에 법의학 심리상담가 자리가 났고, 바로 그 자리에 지원했습니다.

테오는 심리학 공부를 시작할 때,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건 사실이지만 진짜 속마음은 이기적인 이유였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치료하기 위해서 심리학을 공부한 것이라고. 즉 스스로를 돕기 위한 탐색이었다고.

그는 대학생 시절에 심리상담가 루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자살 충동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했을 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루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루스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담 치료는 그렇게 환자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들을 상담가에게 넘겨주는 것이라서, 루스가 테오의 감정을 되돌려줬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테오는 루스의 심리 상담을 통해 평화를 얻었고, 자신의 직업으로 심리상담가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앨리샤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됐습니다.


"네가 얼마나 슬픈지 잘 알아. ...

네가 오랜 세월 떨치지 못했던 그런 슬픔 말이야.

있잖니, 테오. 인정하기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가장 필요할 때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야.

끔찍한 느낌이지. 사랑받지 못했던 고통은."  (141-142p) 


<사일런트 페이션트>는 침묵의 여인 앨리샤와 그녀의 침묵을 깨는 테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의 초기 비극 "알케스티스"가 엄청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주인공 아드메토스는 운명의 여신에게 죽음을 선고받지만 아폴로의 협상으로 살아날 묘안을 찾게 됩니다. 그건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대신 죽게 만들면 아드메토스가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 그는 부모님에게 죽어달라고 부탁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이때 아내 알케스티스가 남편 대신 죽겠다고 나서면서 아드메토스는 살고, 알케스티스는 저승으로 떠나게 됩니다. 헤라클레스가 저승에서 알케스티스를 찾아내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자, 다시 살아난 아내를 만난 아드메토스는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알케스티스는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아드메토스가 절망하여 헤라클레스에게 묻습니다.


"제 아내는 여기 있는데 왜 말하지 않는 것입니까?"  (207p)


앨리샤의 침묵은 너무나 충격적인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끝까지 읽고나면 깨닫게 됩니다.

진실을 알게 된다는 건 크나큰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 판도라의 상자처럼.  늘 그렇듯이 우리는 열고야 말겠지만.

그녀가 입을 연 순간 드러날 진실...그래서 침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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