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여자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여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단순가출인 줄 알았는데 눈앞에서 얼룩이 퍼지듯 사라지는 남자들.
성연은 43세, 남편 형근은 45세로 둘 사이에 아이는 없습니다. 이웃과 친지들은 공격적인 말들을 내뱉습니다.
"너희는 둘만 있어서 그런지 안 늙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낙으로 살아?
노산이면 아이 폐가 안 좋다던데." (26p)
형근은 혼자 서울에 있는 시가에 들렀고, 성연에게 전화를 합니다. 형근의 목소리 뒤로 시모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옵니다.
"쟤는 하필 전화해도 밥 먹을 때 한 대니. 이거 고등어 좀 더 먹어. 김만 집지 말고.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성연이가 김치만 먹였냐. 국 더 줘? 내일 아침에 일 나갈 때 싸줄까?" (49p)
성연은 서울에서 먼 이곳 '구주'의 집이 방공호처럼 느껴집니다.
이 소설에는 성연 이외에도 다양한 여자들이 등장합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과 시모, 중국 여성과 시모, 성연의 오랜 친구 희수, 희수의 딸 선미, 골목길에서 성폭행범을 만난 소녀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과 관련된 남자들이 사라졌다는 것.
주목할 대상은 실종된 남자들이 아니라 남겨진 여자들이라는 것.
성연은 시집을 낸 시인이었으나 첫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될 줄 몰랐습니다. 어쩐 일인지 결혼 직후부터 시를 쓸 수 없었습니다.
"필요없는 문장을 지우다 보면 글자가 다 사라졌다. 모니터에는 깜박이는 커서만 남았다. 기록하지 않은 감정은 아세톤처럼 휘발했다.
아름답고 무결하고 훌륭한 것들은 세공이 끝난 채, 세상에 무수히 나와 있었다.
성연은 완성품 근처를 기웃거리는 일도 버거웠다." (95p)
성연의 삶에서 시가 사라진 시기는 공교롭게도 남편 형근과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을 읽다보면, 사회가 암묵적으로 여자에게 강요하는 것들에 대해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솟구칩니다. 결혼, 출산, 육아, 여자다움 등등.
그 감정의 끝에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곳 '구주'라는 가상의 소도시에서 사라진 남자들이란 왠지 필요없는 문장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구주의 모든 여자들이 남자들의 실종을 반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몹쓸 놈들만 쏙쏙 뽑아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바로 구주처럼 많은 것들이 변할테지만 너무나 블랙코미디 같아서 허탈한 웃음이 나옵니다.
희수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성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성연의 남편 형근은 서울에 피신 중)
"우리가 남자 곁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은 늘 단순하지 않았니? 도망치고 싶다. 성장하고 싶다. 이 자리는 틀렸다.
이 와중에도 남자만을 사랑하다니, 나는 네 시야가 너무 갑갑해."
"난 남자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게 된 것을 사랑할 뿐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관성이지." (263p)
마지막으로 놀란 건 이 소설이 SF장르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SF(science fiction)가 아니라 현실적 고찰이니까. 단순히 페미니즘으로 규정하는 것도 편협한 시각입니다. 굳이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편 가르기를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분노해야 할 건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