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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유년 시절의 기억이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 어딘가에 깊게 새겨지는 것 같습니다.
<종이 동물원>의 저자 켄 리우는 중국 태생으로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입니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새로 시작하는 삶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텐데, 겨우 열한 살 아이에겐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요.
이 책은 켄 리우의 단편소설 14편이 실려 있습니다.
신비롭고 독특한 이야기들 속에서 문득 어린 켄 리우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실제로 저자가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뭔가 꾹꾹 눌러담은 슬픔 덩어리 같습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진정한 '나'는 어디에?
<종이 동물원>은 중국인 엄마를 강력하게 거부함으로써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잭의 이야기가,
<천생연분>에서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마이닝으로 완벽한 알고리즘 세계에서 조정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요괴와 요괴 사냥꾼의 이야기를,
<상태변화>는 인간의 영혼을 구체적이고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낸 기발함이,
<파자점술사>는 이방인 소녀 릴리에게 마법이 깃든 말의 힘을 알려준 파자점(破字占)술사 할아버지 이야기가,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은 예민한 주둥이를 가진 알레시아인, 기계 몸을 지닌 쿼촐리인, 쿼촐리인의 돌 뇌를 꺼내어 수집하기를 즐기는 헤스페로인 등 우주의 다양한 생물종을 소개하면서 모두가 책을 만든다는 이야기를,
<시뮬라크럼>은 미래의 발명품, 시뮬라크럼 카메라-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실감나는 영상, 홀로그램으로 만들어내는-에 대한 이야기가,
<레귤러>는 아시아계 콜걸 모나의 죽음을 파헤치는 전직 경찰이자 현재 사립 탐정 루스의 이야기와 함께 형사들 몸에 장착하는 레귤레이터에 관하여...
켄 리우는 SF 판타지조차도 결국엔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나는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나일까?"
어쩌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어서가 아니라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해서 불행한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켄 리우의 인터뷰가 인상적입니다.
"(미국에서) 유색 인종 작가의 글은 오로지 자전적 고백일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대접받습니다.
저는 그런 분위기를 거스르고 싶어서, 처음에는 제가 물려받은 중국 문화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 매우 조심했습니다.
전혀 중국적이지 않은 서양적 글쓰기를 지향했던 겁니다.
그 결과는 끔찍이도 답답했습니다.
그건 입의 절반이 테이프로 막힌 채 말하는 것, 몸의 절반이 마비된 채 춤추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561p)
<종이 동물원>은 휴고 상, 네블러 상, 세계환상문학상 사상 첫 3관왕을 석권한 작품으로, 미국 SF 판타지 문학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