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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지나간다 -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 이야기
구효서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평점 :
구효서 작가님의 <소년은 지나간다>는 산문집입니다.
책을 읽는 중간에 "창말 소년 구효서... 효서가 1957년 9월 18일에 세상에 나왔으니..."라는 구절을 읽고나서야 작가 본인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너무나 소설 같은 이야기라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실화였다는게 더 믿기지 않습니다.
물론 작가님이 의도적으로 소설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 점도 있겠지만, 스물네 개의 된소리 홑글자로 된 스물네 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방식이 얼마나 희한한지, 처음엔 어리둥절하다 못해 잠시 당황했습니다.
뻘 깨 뽕 뻥 깡 씨 꿀 쓰 빵 뚝 깽 찍 땜 뺨 쓱 꽃 때 쎄 떼 빡 뼈 뽁 떡 끝
각각의 된소리 홑글자마다 그 뜻을 설명하면서 그 글자가 주인공이 되어, 효서가 살고 있는 창말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글자는 다름아닌, '저어쪽'입니다.
창말 사람들이 '저어쪽'이라고 말할 때는 턱으로 염하 건너편을 가리키는데, 그건 바로 저어쪽 북조선을 뜻합니다.
바닷가에 철기둥과 철조망이 들어서면서 '반공' 방첩'이 붙기 전에는 저어쪽 사람들이 몰려왔던 그 곳.
모두가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고 그저 '저어쪽'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효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땜재이가 잡혀 들어갔던 게 '선연하다'라는 말 때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남들 잘 쓰지 않는 선연하다는 말을 쓰는 그가 수상해서 잡혀 들어간 것이라고. 창말 어른들은 좀처럼 쓰지 않는 말이라서 아마도 '저어쪽' 사람이라서 저어쪽 말을 쓴 것 같다는 게 땜재이의 죄목입니다.
그때는 모두 떼로 몰려오고 떼로 몰려가고 떼로 잡혀가고 떼로 죽고... 국방군, 인민군, 중공군, 미군, 영국군, 터키군, 호주군이 몰려올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을 것.
80명이 떼로 죽었다는 '80년 구데이'는 '80명 구덩이'였으며, 정확히는 83명 구덩이였다 합니다.
즌들이라는 마을의 사람들도 그렇게 떼죽음을 당했다는데, 그 시절 즌들 애들은 "아이시, 어~저~냐?"라는 떼창으로 창말 애들을 놀렸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알나리깔나리지만 마을을 짓누르던 공포에 대한 애들만의 대응방식이었나 봅니다.
구효서 작가의 고향은 강화도라고 합니다. 강화도 사투리에는 된소리가 많이 들어가서, '진지 잡수셨습니까?'를 강화도 사투리로 하면 '진지 잡쒔씨꺄?'라고 합니다.
그래서 된소리 홑글자를 핑계 삼아서 어린 시절의 마을 이야기를 썼다고 합니다. 참혹했던 시절이라 차마 말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된소리 홑글자로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창말 소년 구효서는 그렇게 그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스물네 편의 이야기가 싹둑 잘린 듯 느껴지는 이유는 원래 이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문학』에 연재되었던 에세이라서 그렇습니다. 다 읽고나서야 비로소 모든 이야기가 소년이 지나간 길이었음을, 우리의 아픈 현대사였음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