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분들이 박완서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요즘 알라디너분들이 올리신 박완서 작품의 리뷰를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나는 딱히 읽어본게 없다. 오래전 기억을 끌어내 보면 고등학교때쯤 읽었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에세이 정도. 그리고 언제가 어디선가 봤던 칼럼 내용 중 박완서는 원래 시인이 되고 싶으셨다는 것 정도가 내가 그분에 대해서 아는 전부다.
2. 빌릴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은 교회도서관에서, 있는건 일단 빌려두는데 마침 이책도 있었다. [그대는 아직 꿈꾸고 있는가]가는 언제 씌여진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이 어릴때 봤었던 주말연속극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고루한 가부장제 사회의 민낯, 남아선호사상의 전형의 가정,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내용은 그럴지라도, 글을 참 찰지게 잘 쓰시는 것 같아서 읽는 즐거움은 있었다.
3. 책의 내용 또는 문장을 통해서 나의 개인적 체험을 재현해내거나 등장인물의 상황과 감정에 동일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상황 재현과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은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과 작가의 의도와 거의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외아들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박완서의 일기를 담은 내용이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몇년전 아들을 잃고 교회를 방문했던 아는 동생의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살아있는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읽는 내내 그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기를 반복하면서 박완서의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박완서가 막내딸을 보기 위해 간 미국에서의 느낀 감정 구절에서 숨이 멈추어졌다.
"거긴 남의 나라였다. 신경을 곧두세워도 한두 마디 알아들을까말까 한 것도 괴로웠지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이질적인 리듬이었다. 그 이질감은 네가 놀 물이 아니라는 소외감을 끊임없이 일캐워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만약 어떤 피치 못할 운명이 나를 이 땅에 죽을 때까지 묶어두는 일이 생긴다면, 생전 호강을 보장해준다고 해도 아들을 잃은 고통 다음 가는 고통이 되리라고" (250p)
4. 아들을 잃은 고통 다음으로 힘든 것이라고 고백한 박완서처럼. 낯선 곳. 생소한 언어에 둘러싸인 곳에서의 삶은 나에게도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통의 정도가 약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의 사라짐의 이유는 시간의 축적에 따른 익숙함 때문일거라 생각해왔는데,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몇주전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 Jeronimo를 보고 하기 시작했다. 쿠바로 보내진 한국인, 그 이후 한인-쿠바 3,4세들이 여전히 그들은 본인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칭하고 문화를 고수하고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과는 다른 한국인으로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새롭게 하는 그들의 정체성. 터 잡고 살고 있는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지 못함이 단순한 좌절과 고통이 따르는 일이 될 수 있지만, 반면에 그들에게 필요하고 적합한 새로운 놀 물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