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하우징 공동체 - 스칸디나비아와 북미의 연령통합형 코하우징을 찾아서
최정신.홍서정 지음, 최정신 사진 / 어문학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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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주택 셰어하우징

참여과정
이웃을 중요시하는 디자인
개인주택을 지원하는 공동생활시설
주민에 의한 관리
비계급적인 구조와 의사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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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양들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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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한명한명 마음이 가는 이유는 그들의 이름이 내게 너무 친숙해서일 것이다. 흔히들 사극은 역사가 스포라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스포일러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너무도 잘 아는데 그 사이사이에 문학적 상상력을 넣으니 매우 흥미롭다. 사실 성경은 그 어떤 권위적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을 때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었는데 그냥 문학으로서 충분히 즐기면 될 것 같다. 특히 내가 아는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는게 매우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얘가 걔라고?!!! 계속 소리치면서 보는 중.. 픽션이라는 걸 인지하고 본다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spoiler) 책이다. 다만 성경에, 최소한 예수의 행적에 대해 친숙하지 않다면 읽으면서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그래서 고민했지만 근래 읽은 책 중에 제일 몰입도가 높으므로 별 다섯개!(어쩌면 시험기간인게 한 몫 했을지도..?ㅋㅋㅋ) 내일 시험인데 2권의 유혹에 넘어간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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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양들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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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전 7일간의 살인사건]

💡첫번째 살인사건
헬레나(창녀)
- 간음한 자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 앞에 내쳐진 여인. 죄없는 자만 그를 돌로 치라는 현장의 주인공

💡두번째 살인사건
랍비 야이로의 딸
- 귀신 씌인 자로 죽었으나 예수님이 살리신 여인.

💡세번째 살인사건
빵공장 직공 벤자민
- 갈릴리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본 자. 다섯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가 든 광주리의 주인.
- 그 후 모든 사람들을 먹일 빵을 만들고 싶다고 빵공장에 취직한 소년.

💡네번째 살인사건
로마 백인대장 아카리우스 티투스

p.100 야이로의 딸 - 죽었다 살아난 자, 두번째 살인 피해자

"내 발걸음은 당장 그분께 달려가고 싶었지만 내 머리는 완강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었네. 율법을 지켜야 할 회당장이 어떻게 가짜 선지자에게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겠나. 그러는 동안에도 딸아이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되었지. 마침내 나는 결심했어. 회당장 자리를 빼앗기고 광야를 헤매다 죽어도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할 거라고, 그분을 찾는 건 쉬운 일이었어. 나는 그분을 몇 겹씩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헤집고 나아갔지.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선생님이란 말이 튀어나오더군."

p.104

그는 자신의 딸을 죽였을지 모르는 살인자를 비호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파렴치한 아비라도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p.191 빌라도와 테오필로스의 대화

"••• 이 메마른 광야에는 로마와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
빌라도는 골똘한 표정으로 강건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도시의 군중은 영혼의 힘을 보여줍니다. 끈질긴 생명력과 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그것이죠. 그에 비하면 로마인은 사고하고 계산할 뿐이죠."

p.197 빵공장 직공 벤자민 - 세번째 살인 피해자, 오병이어의 주인공

"소금에 절인 작은 생선과 마른 보리빵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먹는 값싼 음식이 아닌가? 가장 가난한 자의 양식을 5천 명이 나누어 먹었다는 거야. 자그만치 5천 명이라네. 그 아이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음식이 특별한 기적에 쓰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 틈이 날 때마다 몇번이나 그 이야기를 했다네. 들을 때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더군."
•••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난 모르겠어. 하지만 진위와 상관없이 그분은 자신의 뜻을 큰돈을 가진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소년을 통해 보이신 게 아니겠나."

p.244 마티아스 - 살인자이자 밀정, 삶을 사랑하는 저

"세상 누구보다 약삭빠르고 교활하지만 이해할 수 없을정도로 멍청하고 무모한 사내지. 마티아스를 살인자라고 저주하는 자에게 나는 땅끝까지라도 쫓아가 말해줄 거야. 그는 가엾은 창녀에게 자기 목숨을 대신 내주었다고 말이야."

p.244 유다 - 12제자

그렇게 생각하자 유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p.278

마티아스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 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아버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무언가를 안다는 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이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알지 말아야할 것을 알아버린 자신이 치려야 할 대가를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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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성경읽기

1. 성경 속 여성 리더십
미리암, 드보라, 야엘, 슬로브핫의 딸들, 훌다, 와스디

2. 문화적 콘테스트 속에서 성경 읽기
- 위줄을 버려라 떠나라?
- 폭스트콜로니얼 관점은 우머니스트 관점과 맞닿음

p.222

즉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자리보다는 하나님의 영 안에서 그가 가진 신앙의 깊이나 지혜가 리더십의 원천이었다는 것이죠.

p.255

닉싱은 관계 재정립을 위한 적극적 소통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성공 여부는 나의 닉싱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너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 ‘와스디’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에 제가 기억하고 싶은 메 시지입니다.

p.231 과연 그래도 될까?

••• 솔직히 남자와 여자에 대해 말한 사도바울의 본문은 그냥 ‘떠나면’ 돼요. 주인과 노예에 대한 본문처럼요.

p.233 ‘여자의 머리는 남자’에 대한 맥락읽기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것도 위계의 의미가 아니라는겁니다. "여자 머리를 보면 어느 남자의 아내인지 알 수 있잖아. 그와 같이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라는 건데, 두 경우 다 영광의 이름이야." 이런 맥락인 거죠. 그러니까 첫째 다른 종교 전통과의 구별을 위해, 둘째 영광과 존중의 의미로 권면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물론 이는 하나의 해석이에요.

p.235 위줄 버리기?

물론 이어지는 구절에 나오는 남편들에게 물으라든가 디모데전서 2장에서 ‘하와가 아담보다 늦게 지음받았다‘고 하는 언급들은 분명 가부장적 제한이 있죠. 이 부분은 ‘위줄‘로서, 혹은 더 이상 문화적 실효성이 없는 구절로서 상대화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p.236

에베소서가 전형적으로 바울학파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나요? 이 서신은 기독교 공동체 첫 세대의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요? 적어도 예수님 이후 첫 세대의 교회는 ‘제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예수님께서 곧 오실 줄 알았으니까요. 이는 남녀 문제나 결혼, 가정에 대한 바울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죠. "기왕이면 그냥 이 세상에서 복음 전파하며 혼자 살아라. 그게 제일 좋다. 그러나 이미 결혼했걸랑 그대로 지내라. 혹 혼자 사는 것을 못 견디겠거든 괜히 욕정에 불타 죄를 짓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낫겠다. 단 새로 결혼하는 상황이라면 그리스도인끼리 했으면 한다."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에 관한 ‘소극적’ 수용입니다. ••• 그러나 에베소서의 본문은 첫 세대가 가도 예수는 안 오시고 세상은 지속되고 공동체는 존속되어야 하는, 이렇게 새로운 상황에서 쓰인 거예요. 세속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했으니 당연 당시의 가부장적 질서를 인정할 수밖에요. 이렇게 본다면 해당 본문의 문화적 제한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p.242 포스트콜로니얼

포스트콜로니얼 입장에서는 성경 역시 제국주의 틈바귀에서 가장 힘을 가지지 못했던 히브리 민족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텍스트로 읽히죠.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모든 층위가 켜켜이 연결된 현실을 드러내는 텍스트요. 그래서 성경을 획일적이고 단층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겁니다. 성경이 ‘언제나 해방적인’ 텍스트는 아니라는 것을 ‘페미니스트’ 시각에서 말해 왔는데, ‘포스트콜로니얼‘하게 접근하면 설명이 더 쉬워요. 성경은 해방적 본문과 더불어 억압적 본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억압받는 인물이 언제나 피해자인 것만도 아니고요. 모든 관계망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에요.

p.243 아프리카 신학자 무사 두베

"백인 남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백인 남자는 우리에게 말했다. 자 우리 모두 눈을 감고 기도합시다. 기도가 끝난 후, 눈을 떠보니 그 백인 남자는 땅을 가졌고, 우리는 성경을 가졌다."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에 힘을 가진 제국의 시각에서 제공하는 성경 해석을 거부하고 식민 상황에서 이를 ‘넘어서기’ 위한 주체적 성경 해석을 시도하는 거예요.

p.247 우머니즘과 포스트콜로니얼

"맞아, 우리는 아기를 품었던 경험이 있는 여자들이지. 그래서 살려 낸다는 것, 지킨다는 것, 보호한다는 것이 뭔지 잘 알아. 나도 살고 너도 살리는 페미니즘은 우리의 능력이야." 이렇게 주장하는 상징이라면 "아줌마"라는 단어를 ‘포스트콜로니얼’하게 수용한 셈이죠.

p.252 우머니스트 성경읽기 원칙

1. "살아라" 말씀하시는 창조 명령을 따르는 데 힘이 되는 본 문 찾기와 해석
2. "살려라" 말씀하시는 구원 명령을 따르는 데 힘이 되는 본문 찾기와 해석
3. 여성의 힘과 권위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데 힘이 되는 본문 찾기와 (재)해석
4. 성경의 ‘경줄’을 잡고 오늘의 상황에서 ‘위줄‘을 잡아내는 재구성과 재생산의 실험.

p.253 주체적 성경읽기 - 개신교 탄생이유

이런 원칙을 가지고 주체적 성경 읽기를 하려면 적어도 신학적, 신앙적으로 단단해야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우려였어요. 물론 공부해야지요. 읽고 생각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도, 역사적 배경 이해도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으세요. 우리가 신앙 안에서 계속 고민하고 기도하며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텍스트가 아닌 ‘성경‘이니까요. 위험하니 하지 말자고요? 성경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읽어 냈던 루터도 당시 가톨릭 주류로 볼 때는 이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오히려 경줄을 다시 찾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도 완전히 읽어 내지는 못했어요. 그게 인간의 한계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사명이 남겨진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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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로 불참.

1. 한국 여성신학자 (정)현경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미래에서 온 편지]

p.193

또한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윤리의 근거가 달라지죠.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후가 바뀌어요. ‘당위 의 윤리’가 아니죠. "인간은 이웃을 사랑해야 해. 난 저 사람을때려 주고 싶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사랑하겠어." 이렇게 의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존재 자체로 인격적으로 바라보면, 그리고 ‘나‘와 ‘너‘로 서로 마주보고 존재의 흐름을 느낀다면, 무엇보다 서로를 감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같이 느낀다면, 그렇다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감정이라는 겁니다. "스며듦"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할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p.198

예수님의 십자가는 목표가 아니라 대가였다는 해석입니다. 십 자가를 위해 태어나고 걸어간 삶이 아니라, 그가 만나고 관계했던 모든 사람에 대한 급진적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였다는 말이죠. 그건 살려 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에 하게 되는 행동이고 그 결과가 십자가였다는 거예요.

p.203 주석 (자유주의 페미니즘 한계)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자유‘가 가장 잘못 결합하는 한 가지 사례는 여성이 갖는 전근대적 기득권과 후기 - 근대적 기득권만을 선택적으로 취합하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전통적으로 여자는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공적 책임을 지지않아도 되었어요. 남자들에게 억압도 받았지만 한편으로 ‘가부장제 유지의 도구’로서 보호도 받았죠. 그 문화적 습속을 가져와서 "여자는 약해. 나를 지켜줘야 해" 이렇게 의존적인 주장을 하고, 반면 "각자도생의 후기-근대사회에서는 나의 직업 기회, 성공 기회를 남에게 양보할 수 없어. 싸워야 해" 이렇게 말하면서 행여 성차별로 인한 불이익을 겪으면 어쩌나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이건 명백히 잘못된 결합체예요. 페미니즘이 제일 먼저 절연해야 하는 것은 전근대적 여성응시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던 차별적 부분만이 아니라 기득권도 포기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나의 자유‘ ‘나의 권리‘ ‘나의 높아짐‘ ‘나의 확장‘ 이런걸로 페미니즘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오용 가능성을 늘 주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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