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쓴다. 올가 쿠릴렌코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모델 활동 덕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제대로 이름을 외우게 된 계기는 프랑스 영화 《약지의 표본》을 보고나서 였다. 나는 프랑스 영화를 잘 보지 않고 그나마도 한때 몰아서 보았는데, 때문인지 막연한 편견―이야기가 진행될 만 하면 끝나버린다던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던가 하는―이 있었다. 지금보다 굳은 머리로 영화를 볼 때도 《약지의 표본》의 발상은 신선했는데,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그때와 달리 어쩐지 지금 이 영화를 보면 괜찮다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우연히 영화의 원작이 오가와 요코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알고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과 추억을 표본으로 남긴다는 것에 이르는 사고 체계가 왠지 지극히 일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독특하고 독특한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설명하긴 힘들고 그렇다. 일본 문학을 많이 읽지는 않지만 공통적으로 간직한 묘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공포물이건 연애물이건 장르를 따지지 않는 그 특유의... 여느 프랑스 영화와 다른 분위기도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어찌 됐든 오가와 요코를 찾아보니 꽤 흥미로운 작가인 듯 하였다. 세계문학에 관심이 많지만 일문학을 향한 레이더는 꺼두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현대소설이나 읽어야 할 고전이라 생각해 몇 작품 읽기는 하는데 그냥 끌리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듯. 예를 들어 일본의 지성으로 꼽히는 겐자부로의 작품들- 『만엔원년의 풋볼』 등을 읽겠노라 다짐했지만 해가 가도 펼치지 않고 있다. 아쿠타카와가 중요 작가인 듯 하여 『라쇼몬』을 샀으나 여전히 읽지 않고 있다. 후자의 경우, 환상소설 어떤 괴담집 느낌이라 더 끌리기는 하는데도 이렇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도 『인간 실격』을 읽었는데, 이 또한 이웃의 리뷰를 보고 구입한 것이다. 이 작품은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글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한국소설과 비교하면 굉장히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졌다. 그게 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재밌게 읽히니 짜증난다. 그럼에도 일문학에 끌리지 않는 것은 알맹이가 없다고 생각해서인데 편견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맞는 말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학부시절에, 언젠가 교수님의 일문학에 대한 말씀에 공감했었다.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도 신경을 극도로 세밀하게 분해한다, 지극히 말초적인 감성이다 그런 말씀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일본소설 류가 그랬고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이 그랬기에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근의 일본 소설을 읽어도 여전히 그런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인상이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 아무튼 이 얘기를 꺼낸 것은 나의 이러한 편견―일본문학은 포장, 스타일에 공을 들이나 알맹이는 부실하다―을 굳게 만들어 준 대담이 있기 때문이다. 박경리 선생님과 도올 김용옥의 대담이다.


몇 해 전에 웹상에서 돌아다니는 글을 읽었는데 찾아보면 출처가 나올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인들은 야만적이다. 사랑이라든가 하는 숭고하고 깊은 감정을 모른다, 오직 치정 뿐이다 그런 내용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당신만큼 일본 문학을 많이 읽은 이도 없을 거라 하셨는데, 어떤 고찰이나 통찰이 부재하는 감상주의를 비판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좀 공감되지 않나...? 나는 옳은 말씀이다, 하면서 일본의 역사와 문화들을 떠올려 보았다. 칼의 역사라. 다테마에니 뭐니 분석할 것 까지도 없고 그들의 영혼 없는 리액션들이 피어오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로맨스는 국가에 상관없이 거의 치정에 관한 듯 하다. 《메꽃》이라는 일본 드라마는 아예 치정을 위한 드라마다. 정말 내일 없이 몸을 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연출도 좋고 그림도 이쁘고 사운드트랙까지 치명치명... 그런 관계에서 몸과 마음의 무게가 같을 수야 없고 서로의 체온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야 숱하게 반복되어 온 클리셰다. 다만 그 표현방식이 상당히 일본스러운, 일본드라마니까 그렇겠지만 치정에 감성을 끼얹고 예쁘게, 예쁘게 포장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별로라는 건 아니고 드라마는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공감하면서도 허무하고 그렇다.


현재 방영중인 《공항 가는 길》도 주인공들의 관계가 불륜이며 유책배우자, 가정 내 불화로 상처입은 인물들이 서로에 기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메꽃》처럼 치명적인 어른의 관계를 보여주기 보다는 보다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린다고 할까. 불륜을 미화하는 느낌도 있지먼 그보다 사랑이 떠나고 마음이 무너지고 그런 모습들, 남녀 간의 감정과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설정이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설득력있게 진행하려고 노력하는 듯 하다.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이 늘어지는 느낌도 있고... 그런 면에선 차라리 《메꽃》이 더 현실적인 듯 하다. 꼬박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요즘 하는 드라마 중에서도 볼만하다. 캐릭터들도 다 있을 법하다. 서도우는 유니콘이니까 빼고.


아무튼 우연히 영화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작가 이름을 잘 기억해 두었다 다음에 읽어봐야지하는 생각을 한다. 비록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여주인공과 방을 함께 쓰는 남자가 좋았다. 함께 방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서로 다른 출근시간에 일어나 창가에서 뒷모습을 바라보던 외로운 어깨. 그 어깨 너머로 피어오르던 담배연기가 생각난다.



찾아보니 트레일러는 좀 별로이고, 씬을 잘라놓은 영상이 있어 가져왔다. 분위기 있고 좋다. 그렇다고 영화가 저런 느낌으로 이어졌던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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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10-2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터에 이미 오가와 요코 원작이라 써 있네… 주의력 결핍이었네… 베스 기븐스가 음악 감독이었네… 몰랐는데 이미 내 취향이었네…

CREBBP 2016-10-2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바님은 원작, 번역 등등 꼼꼼히 보는 편이신데 주의력 결핍이라니, 제가 괜히 찔리네요. 제 경우, 덤벙덤벙 별 정보 없이 먼저 시작하고 다 읽고 나서 혹은 읽는 중간에 엄청 좋으면 폭풍 검색하거든요. 사실 일본 문학이 어떻다, 저떻다 하는 건 장님 코끼리 만지고 말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제 인상에도 박경리 선생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이미지로 남아있어요. 알맹이보다는 스타일이고 고민의 깊이가 앝다, 뭐 그정도로 느끼는데, 읽는 잔재미는 많잖아요? 일본 소설 좋아하는 친구 하나한테 왜 좋아하냐고 물으니, 한국 문학은 너무 어렵대요. 뭔 내용인지 모르겠다고.. 이와는 반대로 90년대인가 2000년대인가의 한국 문학은 죄다 하루키 아류다라고 몰아붙이는 쪼가리 글들도 본 것 같고. 자기가 본 것, 자기의 지적 감성적 능력의 범위 내에서만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게 문학이고 예술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문학이란 게 사실 어떤 주류를 따라서 서로 많이 영향을 주고 받고 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어떤 문화권의 문학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기는 어렵겠지만, 에코의 <책의 세상>에 보면 서구에서는 문학 하면 특정 나라(아마도 영국, 프랑스 정도였던가..에서 특히 성했고, 미술 하면 이탈리아였고 뭐 이렇게 꽃피운 시대와 공간이 있기는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건가ㅋㅋ )

암튼 핵심은 이 글 너무너무 좋다는 거

에이바 2016-10-20 16:02   좋아요 0 | URL
저도 장님 코끼리 만지고 말하는 격이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해도 또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있고, 박경리 선생님의 명성과 통찰력에 기대어 얹혀가는 글이에요. ㅋㅋㅋ 일본문학이 가볍다면 또 한국 문학은 쓸 데 없이 힘을 주고 있는 느낌이에요. 어느 쪽이든 재미가 없어요... 같은 고전을 두고 봐도 재미없고 노벨문학상이 안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고 봐요. 야스나리의 노벨상 수상은 오리엔탈리즘에 적절히 기여했다는 느낌도 있고... 뭐 그렇다고 노벨상이 엄청 권위와 전통이 있는 상이냐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ㅋㅋㅋㅋㅋ 예술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게 정말 옳은 말씀이에요. 구라파는 한 대륙에 있으니 그 물결 타기가 얼마나 좋나요. 서로 아웅다웅하기도 하지만은 한 번 전쟁이 일어나고 나면 문화가 섞이고 또 발전하고... 제가 또 요즘 폴란드 러시아문학을 읽으니 나폴레옹 전쟁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아무튼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ㅎㅎㅎ

2016-10-20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21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