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라를 알게 된 것은 샹송에 대해 찾던 중이었던 것 같고, 제대로 ‘찾아 들은’ 것은 모 영화에 등장한 덕분이었다. 『독거미』 리뷰에서 언급한 프랑스 퀴어 영화 《내가 사랑한 남자》에서 두 주인공의 다정한 한 때를 그린 장면이었다. 사랑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그러니까 성애 묘사를 대체하는 씬에서 바르바라의 노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은 〈Mes hommes〉. 어떻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당시엔 자막 없이 봤었고- 유투브에 넣어보니 영자막이 함께 올라와 있다. 바로 그 장면도 찾았는데 혹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눌러 확인하시길 바란다. (춤이 끝나면 나신이 등장하니 주의!)
클릭> https://youtu.be/jMSuZdv2kBM?t=1h5m28s
이 영화는 마르세이유에서 주로 촬영했는데 주인공들의 웃음 뒤로 펼쳐진 야경에, 바르바라의 목소리가 깔리니 정말 꿈꾸는 듯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기분이었다. 노래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씨디를 사다가 듣고 또 듣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샹송에 입문한 뒤 시간이 꽤 흘렀고…. 이 페이퍼를 쓰는 것은 지난 여름 한 동안 나를 놔주지 않던 노래 때문이다. 역시 바르바라의 노래로 제목은 〈Dis, quand reviendras-tu?〉. 많은 가수들이 다시 불렀지만 그 중에서 장-루이 오베르 앨범을 가지고 있어 링크해본다. 오베르의 노래는 필립 클로델이 쓰고 연출한 영화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사운드트랙에도 실렸다. 사실 오베르는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필립 클로델은 소설가이자 영화인으로, 첫연출작인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이후로 연출과 각본 쓰기를 병행하는 중이다. 대표작으로는 르노도 상 수상작인 『회색 영혼』이 있고, 『무슈 린의 아기』, 『브로덱의 보고서』 등이 번역되었다.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인 중 한 명이다. 이 영화는 정말 정말 좋은 작품이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꼭 보셨으면 한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명연기와 명대본- 아, 정말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더워진다. 영화 제목은 프랑스의 동요 〈맑은 샘가에서〉의 가사이다.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 결코 당신을 잊지 않을 거예요.’ 이 영화를 본 것도, 이후 오베르의 앨범을 산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그래서 또 한동안 유튜브 나들이를 하면서 라파엘의 썩은 라이브(…)도 듣고 하다, 어떻게 바르바라를 알게 되었나 곰곰이 생각한 것이다. 예전에는 위에서 얘기한, 마르세이유 배경으로 춤추는 장면 클립이 바로 떴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오질 않는다. 〈Mes hommes〉로 검색하면 프랑스 INA 아카이브에서 발굴해 공유한 바르바라의 라이브 영상과 최근 개봉했던 영화 《마이 맨》의 클립이 뜬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페이를러 배턴스 노래 정말 잘 한다…. 현대 바르바라(라고 하면 조금 과한가?)처럼 여겨지는 카멜리아 조르다나도 이 노래를 종종 부르곤 한다. 두 사람 다 해석이 좋다. 조르다나는 18살에 혜성같이 등장했는데 프랑스 슈스케인 누벨 스타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데뷔 앨범에 실린 〈Non non non (Ecouter Barbara)〉은 제목도, 가사도 바르바라를 추앙하기 위한 노래다. ‘아 안 나간다고, 술 안 마신다고, 걔를 못 잊겠는 걸 어떡해. 암 것도 안 먹고 바르바라만 들을거야. 어쩌면 걔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이런 가사다. 바르바라의 가사들이 대체로 우울하고, 이별 후의 고통을 노래하다 보니 감정을 떨치거나 리바운드를 위한 곡으로 많이 듣는단다. 아무튼 바르바라에 대해 찾아보면서 그이의 생이 파란만장함을 알 수 있었다. 바르바라의 본명은 모니크 세르프. 파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2차대전이 발발, 독일의 파리 함락 당시엔 숨어지내야 했다고 한다. 재능을 숨길 수는 없었는지 옆집에 살던 음악교사가 아이의 노래를 듣고 공부하도록 돕는다.
국립음악학교에 들어가지만 학비 때문에 그만두고 캬바레에서 노래를 하며, 나중에는 벨기에로 건너가 음악활동을 계속한다. 이 때 자크 브렐과 만나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놀랐던 것은 바르바라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것인데, 그 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와 쓴 곡이 〈Nantes〉였다. 가사를 보고서야 제대로 알았다….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은,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것은 바르바라의 시그니처. 이후 조니 홀리데이, 젊은 시절의 제라르 드파르디유,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과도 공연하며 커리어를 이어간다. 누벨 샹송으로 일컬어지는 바르바라 스타일은 다음 세대 뮤지션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좋아하는 가수만 꼽자면 벤자민 비올레, 에밀리 시몽, 뱅상 들레름….
이 퀴어영화에 또 감사할 점은 ‘체자레 파베세’를 알려준 것이다. 이 이탈리아 시인의 작품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들에서 등장한다. 마르탱은 뤼카를 따라다니는데 어느 순간 관계가 뒤집힌다. 에이즈 센터 앞에서 기다리던 뤼카를 본 마르탱은 다소 냉랭하게 그를 대한다. 돌아서는 뤼카를 불러 파베즈(파베세의 프랑스식 발음)를 아느냐고 묻는데 알 리가 없다. 며칠 후, 문학청년은 뤼카네 집 앞에 파베세의 밑줄 그인 시집을 두고 간다. 갈리마르에서 나온 『피곤한 노동-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라』. 새벽 3시, 마르탱이 불러내 헐레벌떡 뛰어왔던 뤼카는 그의 곁에 누워 등을 돌린다. 그리고 위로하려는 듯, 더듬거리며 시를 왼다.
ce jour-là nous saurons nous aussi 그날 우리도 알게 되겠지
que tu es la vie et que tu es le neant. 당신이 삶이고 당신이 무(無)라는 것을.
-La mort viendra et elle aura tes yeux.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라.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라〉는 10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시이다. 체사레 파베세가 로마에서 만난 마지막 사랑, 미국인 배우 콘스탄스 다울링을 위한 작품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잘 되지 않았고 아마도 그 때문에 파베세가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들은 시인의 사후 사무실 서랍에서 발견되었다. 마르탱이 뤼카에게 이 시집을 건네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왜 뤼카는 하필이면 저 시를 욌을까. “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를 내가 감히 너를 갈망해도 될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거야….
몇 년을 함께 했던, 헤어진 연인이 에이즈로 떠나간 것을 목격하고 자신의 병세도 치료할 수 없을 만큼 깊어졌지만- 마르탱은 여전히 꽃을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한다. 항상 웃으며 유머를 대화 속에 섞는다. 그런 마르탱이 뤼카에게 말한다. 병이 낫는 기적은 없어. 내게 기적은 바로 너야…. 슬퍼할 뤼카를 볼 수 없어 홀로 죽음을 기다리던 마르탱이 택한 시는 역시 체사레 파베세의 작품이다. 「아침이면 너는 언제나 돌아오지In the morning you always come back」.
Etoile perdue, 새벽빛 속에,
dans la lumiere de l’aube, 희미한 별,
grincement de la brise, 산들바람의 웅얼거림,
tiedeur et haleine ― 포근함 그리고 숨결 ―
la nuit est finie. 밤은 끝났다.
Tu es la lumiere et le matin. 너는 빛이고 아침이야
사람을 살게 하고 또 사람을 죽게 하는 사랑…. 파베세의 작품은 문학동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로 다시 소개됐는데 그중에서도 『냉담의 시』에 마르탱과 뤼카가 낭송하던 시들이 실려 있다. 여름부터 조금씩 읽고 있는데 확 와 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힘을 가진 작품이라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탈리아어를 한국어로 옮긴 시를 읽기 전에, 영화에서 나온 프랑스어 버전을 한국어로 옮겨 보았다. 원문은 모두 갈리마르에서 나온 시집이고, 역자 표시 없는 것은 내가 한 것이다.
In the morning you always come back
Le soupirail de l’aube
respire par ta bouche
au fond des rues desertes.
Lumiere grise tes yeux,
douces gouttes de l’aube
sur les collines sombres.
Ton pas et ton haleine
comme le vent de l’aube
submergent les maisons.
La ville frissonne,
les pierres embaument ―
tu es la vie, tu es l’eveil.
Etoile perdue,
dans la lumiere de l’aube,
grincement de la brise,
tiedeur et haleine ―
la nuit est finie.
Tu es la lumiere et le matin.
20 mars 1950
아침이면 너는 언제나 돌아오지
새벽을 환기하는 창은
텅 빈 거리들 끝에서
네 입으로 숨쉰다.
회색빛 너의 눈은
어두스름한 언덕 위에
달콤한 새벽이슬.
너의 걸음과 너의 숨결은
새벽 바람같이
집들을 뒤덮는다.
도시가 전율하고
돌들은 향기를 품네 ―
너는 삶이고, 너는 깨어남이야.
새벽빛 속에,
희미한 별,
산들바람의 웅얼거림,
포근함 그리고 숨결 ―
밤은 끝났다.
너는 빛이고 아침이야.
1950년 3월 20일
마르탱과 뤼카가 주고받은 시로 글을 마친다.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 가져가리―
죽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도 자지 않고 귀머거리처럼
우리와 함께 있다. 오래된 후회나
불합리한 악습처럼. 당신의 눈은
공허한 말, 소리 없는 함성,
침묵이 될 것이다.
당신 혼자 거울을 향해
몸을 숙일 때 매일 아침 당신은
그것들을 본다. 오, 사랑스런 희망이여,
그날 우리도 알게 되겠지.
당신은 삶이, 당신이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은 모두를 바라보고 있다.
죽음이 다가와 당신의 눈을가져가리.
악습을 끊는 것 같겠지.
거울 속에서 죽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것 같겠지.
닫힌 입술에 귀 기울이는 것 같겠지.
우리는 말없이 소용돌이 안으로 내려가겠지.
-김운찬 역, 『냉담의 시』(문학동네)
추가 및 수정) 같은 날 오후 10시 35분
언급된 프랑스어권 가수들의 앨범을 알라딘에서 찾아보았다. 바르바라의 앨범은 모두 품절이고, 장-루이 오베르, 카멜리아 조르다나, 뱅상 들레름의 앨범은 DB에 없었다. 자크 브렐, 에밀리 시몽과 벤다민 비올레의 앨범은 구매 가능. 비올레 이 앨범은 정말 좋다.
바르바라가 부르는 〈Nantes〉와 〈Dis, quand reviendras-tu?〉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