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가 쓴 〈율랄리〉 원고 (출처: 위키피디아)

 



율랄리



내 영혼은 홀로 거했다

신음의 바다에서

내 영혼은 정체된 조류였다

아름답고 상냥한 율랄리

       수줍어하는 신부가 되기까지

노랑머리의 어린 율랄리

       나의 미소 짓는 신부가 되기까지


아아 밤하늘 별들도

그만큼 빛나는 그 소녀의 눈만큼

그만큼은 밝지 않았다!

수증기가 보라색 진주색

달빛 섞어 만드는 눈의 결정(結晶)은

정숙한 율랄리의 하찮은 컬과도 견줄 수 없다

반짝이는 눈을 가진 율랄리

       그녀의 꾸밈없는 미미한 머리칼 컬과도 견줄 수 없다


의심도 고통도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그녀의 영혼은 탄식에 탄식으로 답하고

하늘의 아슈타르테는

하루 종일 밝고

강렬하게 빛난다

그럴 때 율랄리는 엄마 같은 눈을 들어 그녀를 본다

그럴 때 율랄리는 연보라색 눈를 들어 그녀를 본다



《꿈속의 꿈》(106-107), 공진호 역


 

〈율랄리 Eulalie-A Song, 1844〉 역자 해설: 율랄리를 통해 외로움과 절망에서 구원 받는 노래. 그녀는 산출력과 성적인 사랑의 여신 아슈타르테에게서 아름다움과 힘을 얻는다.

 


-Virginia Poe (1822~1847), 사후 그려진 초상

 


율랄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아내, 버지니아를 가리키는 것 같다. 결혼을 한 시인이 얼마나 들뜨고 행복했던가. 외롭고 상처입은 지난 날을 보상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보니 〈Deep in Earth〉라는 2행의 시가 더 있다. 버지니아가 결핵으로 사망한 1847년, 〈율랄리〉의 원고에 남긴 글, 연필로 쓴 아주 희미한 글은 다음과 같다.


  

Deep in earth my love is lying

    And I must weep alone


땅 속 깊이 내 사랑 누웠네

  나 홀로 눈물 흘려야하네



〈율랄리〉에 덧붙이려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버지니아를 잃은 슬픔을 표현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글이 암시하는 것은 시인이 다시 외로워졌다는 것이다. 결혼하기 이전처럼...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마지막 행

 


〈Deep in Earth〉를 기형도 시인의 단어를 빌려 번역한 것은 읽자마자 이 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사랑이 땅에 묻히는 것과 기형도의 사랑이 빈 집에 갇히는 것... 두 시는 모두 사랑하는 이, 혹은 사랑 자체의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포의 사랑은 죽음이 앗아갔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중단되었거나 거부되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그러나 기형도의 사랑에선 죽음이 암시되진 않으나, 대상의 부재로 인해 그 감정이 더 이상 상호적이지 않음을 느낀다.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은, 그러니까 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은 미완성인 걸까. 포의 마음에서 툭 떨어져 나온 2행의 시구처럼.


포의 작품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시론과도 관계 있다. 그가 생각하는 시의 정수는 아름다움이고,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은 우울한 톤과 운율(음악성)이며, 그 소재는 미인의 죽음이다. 그 예로 잘 알려진 시 〈애너벨 리〉와 어제 포스팅한 〈울랄룸〉이 있다. 그러다면 아름다움은 미인의 죽음으로서만 표현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순수하게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찬양하고 노래하는 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헬렌To Helen〉이다.





헬렌 (1)



헬렌, 당신의 아름다움은

  여행에 지친 방랑자들을 태우고

고향을 향하여 부드럽게

  향기로운 바다를 항해하는

  옛 니케아의 군함과 같아요


당신의 히아신스 머리카락 고전적인 얼굴

  물의 요정 같은 자태는

절망적인 바다에서 오랜 세월 방황하던 나에게

  그리스였던 영광 로마였던 장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지요


저기 저 찬란하게 빛나는 우묵한 창가에

  석영 등잔불을 들고 서 있는

당신은 정말 조각상 같아요

아아! 당신은 프시케

성스러운 땅에서 온 프시케



《꿈속의 꿈》(85), 공진호 역




〈헬렌(1) To Helen, 1831〉 역자해설: 14살 때 만난 동급생의 어머니 제인 스티스 스태너드를 위하여 쓴 시이다. 그녀의 상냥함과 우아함은 포에게 황량했던 세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비치게 해주었다. 그런 이상적인 여인에게 어울리는 이름으로 트로이의 헬렌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시를 지었다. 그녀는 1824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헬렌To Helen〉이란 제목을 단 시는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제인 스태너드를 위하여, 다른 하나는 사라 헬렌 휘트먼을 위하여 쓴 시이다. 여기서는 처음 씌어진 시만 보려고 한다. 친구 엄마에게 쓴 사랑의 시라 하니 무언가 불손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포의 생애와 시구들을 잘 살펴보면 너무도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임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포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고 양부 앨런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상냥하고 따스한 어머니, 친구의 어머니였던 아름다운 제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포는 제인을 지상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던 트로이의 헬레네(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던 바로 그 헬레네)에 비견한다. '절망적인 바다에서 오랜 세월 방황하던' 선원인 자신(포의 어린시절)을 위로해주었던 그이로, 에로스가 사랑하는 '프시케'(〈울랄룸〉 포스트의 프시케 신화 참조)로 말이다.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어의 면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그 나이에 쓴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천재는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에드거는 제인 스태너드를 자주 찾았고, 그녀는 우울해하는 아이를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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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09-09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에이바님이랑 저랑 둘다 기형도가 스쳐 갔네요. 문학교(敎)라고 해야 하나ㅎ;

에이바 2016-09-09 08:43   좋아요 1 | URL
그렇네요 아갈마님... 예전에 기형도 시와 그로테스크에 대해 쓰신 글이 인상깊었습니다. 내공이...ㅠㅠ

AgalmA 2016-09-09 21:47   좋아요 1 | URL
내공이라니; 에이바님 내공에 제가 박수칠 때가 더 많을 걸요^^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