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 마르셀라 이야기

 

아버지에게서는 엄청난 ‘재산’을, 어머니에게서는 ‘아름다움’을 물려받은 마르셀라에겐 구혼자가 줄을 선다. 조카의 후견인이었던 삼촌은 구혼자들에 대해 알려 주면서 마음에 드는 이를 골라 결혼하라고 한다. 그러나 마르셀라는 아직 어려 결혼이라는 부담을 질 자신이 없다고 하였고, 삼촌은 더 권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의 의지에 반하는 결혼을 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셀라가 목동이 되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확인한 이들 때문에 구혼자 목록이 더 길어진다. 자유롭게 살기를 택했지만 마르셀라는 전과 마찬가지로 순결했다.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였고 정다운 대화를 나누었지만 연애, 혹은 결혼에 대한 여지는 조금도 주지 않았다. 그런 낌새가 보이면 상대를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 마르셀라를 두고 남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섬기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그렇게 냉정하고도 무정하게 굴면서 남자들을 절망하게 만드니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마다 잔인하다느니 은혜를 모른다느니 하면서 그녀의 태도를 단정 짓는 말들을 큰 소리로 내뱉는 거예요. (170)

 

결국 구혼자 중 하나인 그리소스토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람들은 사랑에 응답하지 않은 마르셀라를 탓한다. 그리소스토모의 장례식에서 그가 쓴 시를 낭독하는데, 그 내용은 마르셀라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고백하기보다는 ‘그녀의 평판과 명성을 해치며 질투니 의심이니 버림받은 것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때 마르셀라가 나타났고, 고인의 친구 암브로시오가 소리친다.

 

「오, 이 산중의 지독한 독사께서는 혹시 그대의 잔인함 때문에 목숨을 버린 이 불쌍한 자가 그대를 보고 상처에서 피를 쏟는 것을 확인하러 오셨는가, 아니면 그대의 타고난 성격이 저지른 잔인한 소행을 으스대러 오셨는가.」

 

이에 마르셀라가 말한다.

 

「저는 저 때문에 온 겁니다. 그리소스토모의 죽음과 그의 고뇌가 모두 제 탓이라고 하시는 말씀들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는지를 이해시키러 온 겁니다. […]

 

여러분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늘은 저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해 달라 하지 않아도 저의 아름다움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제게 보여 주신 사랑 때문에 저 역시 여러분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제게 주신 타고난 이해력으로 무릇 아름다운 것은 사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역시 자기를 사랑하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자가 못날 수도 있고, 못난 것은 싫은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나는 네가 미인이라서 너를 좋아한다. 나는 비록 못생겼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만일 양쪽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같아야 되는 법은 없습니다. 아름답다고 다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 

 

제가 들은 바로는 진정한 사랑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며, 강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가 이러하고 저도 그렇게 믿고 있는데, 왜 여러분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제 의지를 굴복시키고자 강요하시는 겁니까? 말씀해 보세요. 하늘이 저를 아름답게 태어나게 해주시는 대신 혹시 못생긴 여자로 만들어 주셨더라면, 저는 여러분들이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도 되는 건가요? 무엇보다 저의 아름다움은 하늘이 베풀어 주신 은혜로, 제가 요구하고 선택했던 것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독사가 독을 갖고 있어서 그 독으로 사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이 준 것이니 죄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아름답다 해서 비난받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 


정조가 사람의 몸이나 영혼을 장식해 한층 더 아름답게 하는 미덕의 하나일진대, 아름답다고 사랑받는 그 여자가 그 정조를 버려야 할까요? 단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써서 여자의 정조를 짓밟으려는 자의 뜻에 맞추기 위해서요? 저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고자 들과 산의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 

 

사랑하는 마음이 희망으로 지탱된다면, 저는 그리소스토모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을 준 적이 없으므로 저의 무정함보다도 오히려 그분의 집념이 그분을 죽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생각은 순결했다고, 그러니 그분의 생각에 응했어야 했다고 제게 짐을 지우신다면, 말씀드리지요. 지금 그분의 무덤을 파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분이 순수한 뜻을 제게 고백했을 때 저는 그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제 뜻은 언제까지나 혼자 사는 것이며 땅만이 은둔의 열매와 제 아름다움의 부산물들을 즐길 수 있다고 말입니다. […] 

 

제가 그분과 놀아났다면 그건 거짓이었을 것이고 그분을 만족시켜 드렸다면 그건 제 뜻과 의도에 반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제가 분명히 거절했는데도 단념하지 않으셨고, 제가 증오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절망하신 겁니다. 이래도 그분의 고통이 저의 잘못인가요? […]  

 

제가 약속도 하지 않았고 속이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잔인하다느니 살인자라느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늘은 아직까지 제가 운명으로 사랑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사람을 골라 사랑해야겠다는 마음도 제게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제게 사랑을 구애할 분들이 모두 들어 주셨으면 해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 때문에 죽는 사람이 있더라도 질투나 불운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에게도 질투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버림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 

 

그리소스토모를 죽인 것은 그의 초조함과 무모한 욕망이었거늘, 어찌하여 저의 정결한 행동과 신중함을 죄라고 하시는 겁니까? 저는 나무들을 벗 삼아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데, 남자들에게서 순결을 지키기를 요구하면서, 또 그것을 잃도록 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아시다시피 전 재산이 있으며 남의 것을 욕심내지 않습니다. 저는 자유로워 남에게 속박되는 것이 싫습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도 증오하지 않습니다. 이자를 속이고 저자에게 구애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를 우롱하지도 다른 사람과 놀아나지도 않습니다. […]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산 주위에 다 있습니다. 이곳 밖에서 원하는 일이 있다면 그건 하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즉 태초의 거주지로 향하는 영혼의 발걸음뿐이랍니다.」 (192-196)

 


《돈키호테》 1편은 1605년 출간되었다.

리뷰: http://blog.aladin.co.kr/769383179/7909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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