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피아나 - 짧게 쓴 20세기 이야기
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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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오우르제드니크의 『유로피아나』의 부제는 ‘짧게 쓴 20세기 역사 이야기’이지만 일단 책을 펼쳐 읽고나면, 이를 역사서로 볼 것인지, 소설로 볼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오우르제드니크는 역사적 장면들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하여 번역가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들어 설명하면서, 그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글쓰기가 아닌가 하고 있다. 동의하는 바이다...

 

170쪽의 짧은 글이지만 사회적인 현상에서 경제로, 문화로, 정치로, 종교 그리고 미학으로 점프하기를 여러 번이니 어떤 식으로 리뷰를 써야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우르제드니크처럼 문장을 길게 늘여서 중구난방처럼 보이게 해보자 이런 생각에도 이르렀지만 아직 내공이 부족하여 그 정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슬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글인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세심하게 배열되고 배치된 글이라 보는 것이 옳으리라.

 

대체로 믿거나 말거나 풍의 분위기를 풍기고는 있지만 오우르제드니크가 유독 신경을 쓴 것 같아 보이는 대목은 인종 학살과 기억에 관한 부분이다. 이처럼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 속 장면들은 비슷한 문장들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 혹은 즐기려면 20세기 유럽사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겠고, 그렇지 않아도 읽는데 아쉬움은 없다. 짧은 글이지만 독자를 흡입력 있게 붙들어 두지는 못한다는 게 흠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로 씌인 역사, 소설로 접근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다음은 인상깊었던 기억에 대한 세 문단.

 

역사학자들은 20세기에 세계적으로 대략 60회의 인종 학살이 일어났으나 전부 역사적 기억에 포함되지는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기억이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하며 기억은 역사적 영역에서 심리적 영역으로 옮겨 갔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방식의 기억이 마련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제 사건에 대한 기억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기억의 문제라고 했다. 그리고 기억의 내면화 때문에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어떤 빚을 갚아야 한다고 느꼈지만 누구에게 무슨 빚을 갚아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홀로코스트나 쇼아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인종 학살이 아니라 인종 학살을 넘어선 어떤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어떤 것이라고 하며 이 특수성을 표현할 만한 다른 이름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인종학살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전용하려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어떤 인종 학살이든 피해자는 자기들의 경험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마련이고 유대인들은 역사적 현실을 발현된 형태와 혼동하고 있으며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대부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를 마치 영화의 극적인 한 장면처럼 상상하도록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44,45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공산주의가 인류 문명에 대한 새로운 위협을 드러냈다고 말했는데 그 위험이란 역사적 기억의 실종이며 이전에도 여러 독재 정권이 도서관과 박물관 등등에서 기억을 검열했다는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기억의 말살을 공적인 혹은 개인적인 삶의 모든 영역까지 확대했고 법적인 원칙으로 승화시켰는데 이것은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103

 

인류자들은 말하기를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는 박물관이나 기록 보관소보다 기념비가 더 나은데 왜냐하면 기념비는 역사보다 기억에 호소하기 때문이며 역사가 살아있는 과거를 시간 속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정당성을 없애 버리는 반면에 기억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학자들은 기념비가 사회의 기억을 분류하고 집단 기억을 조직화하며 전반적인 망각 특히 구체적인 망각과 싸우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나 사실상 다른 형태의 망각을 창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말했으며 철학자들은 망각조차도 체계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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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찌찌뽕.. 전에 에이바님 포스트 보고 저도 이 책 구입해놓고 있다가 막 읽으려고 꺼냈는데 ㅎ

에이바 2016-02-16 17:32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기네스님 저번에 읽으신다고 그러셔서 리뷰 기다리고 있어요. 전 리뷰 포기...ㅋㅋㅋ

2016-02-16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17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