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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란 이름을 들었을 때, 그 길이와 운율성이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작품을 읽어보겠다는 생각에 이르진 못했는데 당시엔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 우연히, 그의 작품을 접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이룩한 회화성이 무척 기억에 남았다. 이때도 감탄만 했지 읽지 않았다. 읽어야 하는데 라는 일종의 부채의식은 도서정가제 시행 직전 그의 작품을 하나 고르게 했다. 제목도 예쁜 『황금 물고기』. 그리고도 시간이 흘러 이제야 그 세계에 발을 들인다. 그때 그 느낌이 기억 속에서 윤색되었기 때문일까? 기대에 미치지 못해 조금은 속았다는 기분으로, 노트를 찾아보니 그 소설은 『사막』이었다. 하르타니를 기다리는 랄라였던가... 『사막』의 랄라는 『황금 물고기』에 등장하는 랄라 아스마와 동일인물일까?
여러 일화들을 통한, 이 프랑스 문호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1997년에 발표된 이 작품에 대한 감상에는 약간의 실망이 함께 한다.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촌스러움을 느꼈다. 문장, 표현은 감성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이다. 그러나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제시되는 방식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연상시킨다. 흔히 서양문화에서 그려지곤 하는 동양 혹은 탈서양적 세계, 어떤 정신적 구도의 길을 제시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물론 주인공 라일라의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 근원 찾기의 길은 그녀가 ‘원래의 문화에서 뽑혀져 나와 타문화 안에 감금된 아이’라는 점에 연유하고 있다. 문명도시의 대척점에 위치하는 이 근원지의 평안함은 상처받은 라일라를 치유함으로써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강조한다.
라일라가 자신의 근원지로 돌아가 자리 잡고 안정을 찾는 모습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 제3세계는 서구 문명을 반성하기 위한 대체로 제시되고, 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는 라일라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세계의 현실에 대한 시각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호문화성을 강조하는 작가의 이력을 모르는 바 아니며, 그가 『황금 물고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시대적 사정을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발상은 촌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어린 라일라가 겪어야 했던 비극에는 슬픔을 느꼈지만, 한없이 욕망에 충실한 그녀를 보며- 과연 이 소설의 끝에서 엿본 미래가 마냥 아름다울 것인지, 회의가 인다.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_160쪽
소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너무 많은 일을 겪게 되는 아이는 ‘밤’이란 뜻의 라일라로 불린다. 아이의 인생은 감금과 자유로 설명할 수 있다. 그녀가 만난 이들은 도움을 주면서 ‘그물’을 함께 펼친다. 이러한 구속은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일종의 보호받는 느낌,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소녀는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다. 에너지를 소진하면 다시 떠나온 곳, 감금되었던 장소로 온다. 돌아갈 곳이 어딘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는데 그중에서도 아이와 조손 관계를 형성하며,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는 엘 하즈는 중요한 인물이다. 소녀에 대한 애정이 마리아 마포바의 여권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의 애정으로 라일라는 이름과 자유를 얻는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밤의 파리였다. 라일라가 어딘지 모를 고향을 그리워하며, 비슷한 상실을 위로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시간. 그녀는 자신을 가리켜 이중생활을 하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라 하며, 다른 바퀴벌레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도시 곳곳에 모여 그들의 언어와 몸짓으로 밤의 축제를 벌이는 사람들. 무리에 속하지 못한 이들에겐 위협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빛이 사라진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존재감을 발산하는 사람들. 바퀴벌레라 함은 자신들을 탐탁찮게 여기는 시각을 비꼬는 것일까? 그곳에서, 라일라는 아름다운 시몬을 만난다. 그리고 음악을 통해 내면을 표현하는 것을 배운다. 그 음악은 마른 땅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실망에도 불구하고 『황금 물고기』는 좋은 소설이다. 다양한 시각으로 다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들- 아벨, 들라예, 독일문화원의 쇤, 도서관의 루시디, 노노, 장-이 라일라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 차이는 어떠한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직 어리고 이기적인 라일라가 타인에 대한 동정을 발휘하는 때는 언제인가? 프란츠 파농의 책을 옆에 끼고 니체를 외는 역사학도 하킴이라는 캐릭터는 어떠한가? 신분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프렌치 드림은 어떻게 다른가? 랄라 아스마는 라일라를 감금(혹은 보호)했지만, 정신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단련시킨다. 소녀의 지적 수준은 프랑스 대입준비시험 중 철학과 역사과목에선 어려움이 없을 정도다. 이렇듯 어떤 사람, 어떤 사건에 대한 다양한 모습들(혹은 모순) 외 미국으로 건너 간 라일라가 겪는 우연들을 통한 독서도 흥미롭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