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멍충한 - 기묘한 이야기에 담아낸 인간 본성의 아이러니
한승재 지음 / 열린책들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니안niian이란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들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니안의 글을 받아 번역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톨킨 옹이 <나는 프로도 배긴스의 레드북을 번역했을 뿐이다.>라고 했듯이! 참신한 시작이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연유도 인상 깊다. 홍대 앞 놀이터에서 파는 책들을 열린책들의 편집자가 보게 되었고, 읽어보니 재미있어서 출간되었다는 것이다. 이 편집자는 에필로그에서 니안의 하수인4로 격하되었다. 이런 뒷얘기를 듣고보니 유행어 <될놈될>이 생각난다. <될 놈은 뭘해도 된다.>는 뜻이다. 내 생각엔 한승재 작가가 그런 이가 아닌가 한다. 등단 없이, 내가 쓴 글이 국내 유수 출판사에서 출간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아주 우연한 방식으로? 책 얘기를 하기에 앞서 작가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엄청멍충한』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비둘기파티」는 1,2편으로 나뉘어 있어 하나로 쳤다.) <멍충>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표시해봤는데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섯 군데를 찾았다.

 

27p 멍충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43p 성실하지만 멍충했던 이들의 종착지, 성실하고 멍충한 사람들

154p 이렇게 멍충한 애국자

159p 부지런한 멍충이들

 

이 단어를 노골적으로 사용한 부분은 몇 군데 되지 않지만, 제목이 『엄청멍충한』인 이유는 말 그대로 멍충한 이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멍충>이라는 말은 어감이 세지 않고 애교스럽다고 해야 할까. 약간의 핀잔이 섞인 듯한 기분이 든다. 멍청하다고 하는 것보다 조금은 덜 멍청한 느낌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그런 의미의 <멍충이들>이다. 「비둘기파티」에서처럼 실소를 뿜어낼 정도로 우스운, 멍충이들이 있는가 하면, <뒤돌아보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검은 산」의 멍충이도 있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벌이는 <멍충한> 일들은 무심코 읽으면 바보같이 느껴지지만 돌아서면 그것이 나의 모습이 아닌가, 하여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독특하고 기발하게 버무려내는 얘기들은 함께 실린 일러스트를 통해 시각화되기도 한다. 작가가 건축가라 그런지 그림도 발군의 실력이다. 한편 「비둘기 파티」와 「자살에 의한 타살」에서 그려내는 상황들은 다소 기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각각의 단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한번쯤 겪어봤을 법한 일들을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 때의 막연했던 느낌을 잡아내는 장면에서는 공포물이 아님에도 등허리가 선뜩해진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성인용 라벨을 붙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미성년자 열람 불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설명하긴 힘든데... 약간 위험한 책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미있단 얘기다.

 

조금 더 사족을 붙이고 싶은 단편은 「직립 보행자 협회」이다. 제목만 봐도 그럴싸한 이 글은 라디오헤드의 「Just」라는 곡의 뮤직비디오에서 영감을 받은 글이다. 노래만큼이나 수작인 뮤직비디오는 스틸 사진으로 책에 실려있는데 시간이 허락한다면 한번은 감상하길 권한다.(영상은 아래에) 이 글에서는 척추가 푸딩처럼 녹아내리는 현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이 현상의 흑막으로 등장하는 톰 요크(라디오헤드의 보컬)은 특유의 춤사위로 유명한 사람이다. 팬들이 애정을 담아 오징어춤이라 부르는 그의 춤실력은 「Lotus Flower」에서 예술성이 만개하였다. 나아가 「Atom for Peace」에서는 행위예술처럼 느껴진다. 전지적 팬 시점에서, 이 사람의 본업이 뮤지션이 아니라 댄서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오징어춤의 시초는 「Idioteque」의 라이브 영상이었다. 「Just」에도 잠깐 나오긴 하는데... 글 속에서 <척추가 녹아내리는 기분>을 춤으로 표현한다면 톰의 오징어춤이 아닐까 한다.

 

이 단편을 재미있게 읽어서 그런지 라디오헤드 멤버들에게도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실력이 된다면 번역이라도 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톰 요크의 이름을 <Thom Yorke>라고 써 줬으면 더 좋았겠다는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기도 하지만 뭐, 라디오헤드를 대놓고 언급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랴?


뒤에 실린 「불필요할 수도 있는 독후감」을 읽고보니, 무릎을 탁 치게 된다. 교통카드에서 거울 속의 비친 상에 이르기까지 니안은 내안에 들어와 한바탕 휘젓고 갔구나!

 

 

61p 그가 순간 일어서면서 느낀 것은 남자들에게는 흔히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이른바 <오르가슴>이라는 따사로운 폭풍이었다. 분명히 그랬다. 몸속의 연유와 꿀과 햇빛이 뒤섞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겪는 나른한 느낌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63p「어후, 그동안 직립 보행 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아, 직립 보행이란 얼마나 눈물 나도록 슬픈 일이던가. 미고는 그동안 서서 보낸 자신의 시절이 힘겹게 느껴져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등허리가 출렁이는게 느껴졌다. 너무 간지럽고 야릇한 기분에 그는 신나게 웃어 버렸다. 정확하게 미친놈의 형상이었다.

 

89p 멜팅 현상이 지구를 뒤덮기 시작할 무렵, 허리가 녹아내린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나뒹구는 모습은 그리 좋지만은 않은 광경이었다. 런던에서는 최초로 응급 침대 제도를 도입했다. ... 공무원들은 매시간 도시를 돌며 응급 침대를 깨끗이 닦아 두었다.


92p 신체 퇴화는 인류 진화 역사상 최초의 역주행이었다. 이것은 인류 진화 그래프가 하향 곡선으로 꺾이는 점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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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3-3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가 컬러링북 같습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 나온 책치곤 표지 디자인이 엄청 심플하군요. ^^;;

에이바 2015-03-30 19:40   좋아요 0 | URL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이에요. 단편 중 하나인 비둘기 파티인데 처음엔 저도 심플하다고 생각했는데 글 읽고 나니 표지가 색달라 보여요. 말씀대로 컬러링북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