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시대정신이 되다 - 낯선 세계를 상상하고 현실의 답을 찾는 문학의 힘 서가명강 시리즈 27
이동신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대에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서가명강 27번째 책은 서울대 영어영문과 이동신 교수의 영미 SF 강의다. 최근 김초엽의 SF 소설과 듀나의 미스터리 SF 소설을 관심 있게 읽어서 SF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멀티버스를 다룬 30일의 밤도 재미있게 읽어서 다중 세계관에도 관심이 갔다.

SF는 다 문학 장르에 비해 비교적 역사가 짧다. 혹자는 1800년 초반에 쓰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SF 문학의 시초로 본다. 이동신 교수는 1800년 후반에 쓰인 허버트 조지 웰스의 <타임머신>을 SF 문학의 시작이 아닐까 서술하고 있다. SF (Science Fiction) 소설은 한국어로 공상과학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SF 소설은 과학기술적 요소를 내용 전개에 중요한 요소로 둔다.

판타지와 SF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그래서 판타지 문학 속에 SF 문학을 넣어둔 곳도 있다고 한다. 판타지는 마법과 같은 허구, SF는 과학이 들어간 (어쩌면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이루어질 수도 있는) 허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저자는 흔히 아는 SF소설, 영화, 드라마를 예시로 들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SF와 판타지를 구분하는 것은 인지적 낯섦과 노붐(Novum)이라고 한다. 알고 있지만 다시 보면 실제 생각과는 다른 것이 인지적 낯섦이고, 노붐은 새로운 것, 특히 SF장르에서는 그 노붐 때문에 우리의 세계관과 우주가 다 바뀔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고 한다.

왕좌의 게임은 판타지 장르이다. 그래서 왕좌의 게임에 나온 용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 영화 트랜스포머는 SF장르이다. 로봇과 과학이 얽히고설킨 장르에 상상의 동물인 용이 나온다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연계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SF 장르가 무너진다. 초반 SF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SF에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SF장르를 넓히며 후반의 사변소설이 나왔을 때 SF란 무엇인가 정의하기가 어려워진다. 좁은 의미의 SF와 넓은 의미의 SF가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건즈백에게 SF는 '무엇보다도 가르치는 도구였지만, 가르친다는 걸 드러내지 않는 도구'여야 했다. 당연히 잡지에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과학기술이나 제품에 관한 기사가 실렸기 때문에 '과학 저널리즘'의 역할도 수행했다.
p145 <3부 I 우리에게는 SF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중에서

SF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휴고상은 미국의 SF 잡지 작가이자 편집장인 휴고 건즈백의 이름에서 따왔다. 유럽에서 SF 문학이 시작되었으나 유럽은 세계 1,2차 대전을 겪으며 과학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SF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다. 1900년 초반 미국은 과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었고, SF 잡지를 펴낼 수 있는 값싼 펄프지가 있었고, 잡지 광고 수익금으로 잡지를 싼 가격에 팔 수 있었다. 이에 휴고 건즈백은 SF 소설 잡지를 통해 과학기술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고 한다. SF 문학이 순수문학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외삽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그 외삽 때문에 최근 몇 년 동안 SF 문학의 인기가 판타지 문학 보다 떨어졌다고 한다(어벤저스 시리즈가 나오면서 관심을 가짐). 사람들은 힘든 현실을 잊고자 책으로 도피한다. 판타지 소설은 사람들의 훌륭한 현실 도피처가 되어주나, SF 문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비판하는 등 현실도피처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자는 SF를 외면하고, SF는 외삽을 하고, 독자는 계속 SF를 외면하고, 결국 아무도 읽지 않는 문학 장르가 될까 저자도 걱정, 나도 걱정된다.

SF장르를 다루다 보니 다양한 소설과 미디어가 예시로 쓰이고 있다. 그중 흥미로운 책은 로저 맥브라이드 앨런(Roger MacBride Allen)의 <더 모듈러 맨>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음)이다. 최근에는 이런 류의 소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당시만 해도 놀라운 내용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죽기 전에 자신의 정신을 로봇청소기에 넣고 로봇청소기가 사람이냐 아니냐로 재판을 하는 소설이라고 한다. 아직도 난 이런 내용에 답을 내기가 어렵다. 로저 맥브라이드 앨런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냈을지, 한국어판으로 나온다면 한번 읽어보고 싶다.

내가 왜 SF영화를 좋아했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하는 스타트렉을 좋아했다. 주차 걱정, 도로 막힘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우주인이 멋있고 그들이 탄 우주비행선도 독특하게 멋있고, 어쩌다 흥미로운 외계인도 만나 볼 수 있어서였던 같다. 영미문학권 SF를 학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들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21세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 나사의 회전 미래와사람 시카고플랜 시리즈 6
헨리 제임스 지음, 민지현 옮김 / 미래와사람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타르튀프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 이 시리즈의 6번째 이야기 <나사의 회전>도 읽어보게 되었다.

<나사의 회전>은 1898년에 발표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다. 영화와 드라마로 끊임없이 재탄생했다고 하는데 난 읽어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졌다. 책을 다 읽고 영화를 검색해 보았다. 영화가 공포물이라서 내가 안 봤나 보다. 책을 읽을 때는 공포물이라는 생각이 없었는데, 영화 제작진들의 필모와 영화의 스틸컷을 보니 무섭다!

(왜 기쁘고 즐거운 성탄 전야에 괴담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성탄 전야에 사람들이 모여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씩 한다. 메리 셸리와 존 윌리엄 폴리도리도 서로 심심한데 무서운 이야기나 하나씩 만들어 이야기해 보자 한 것에서 공포소설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만들어졌다. 이야기를 만들어 이야기하는 것, 무서운 이야기를 찾는 것은 사람들의 어떤 심리가 작용한 것일까.

성탄 전야의 한 사람이 한 어린아이와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보다 무서운 이야기를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러자 60대 전후로 추정되는 더글라스라는 사람이 자기는 더 무서운 이야기를 안다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40여 년 전 자기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누이의 가정교사가 직접 겪은 일이라고 들려준 이야기라며, 두 어린아이와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내비친다.

더글라스는 가정교사가 쓴 글을 읽어주면서 괴담을 시작한다. 더글라스 보다 10살 연상의 가정교사는 가난한 햄프셔 목사관 출신의 처녀로, 가정교사 일을 위해 20살 무렵 런던에 올라온다. 거기서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간다. 매력적인 독신남은 자신에게 고아가 된 조카 둘이 있는데 시골 블라이저택에 가서 조카들의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한다. 가정교사는 전임 가정교사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게 찜찜하지만 꽤 많은 급료를 보고 일을 수락한다.

아늑한 블라이저택과 천사같은 8살 소녀 플로라와 10살 소년 마일즈, 그리고 포근한 느낌의 그로스 부인과 묵묵히 일을 하는 하인들. 가정교사는 찜찜함을 뒤로하고 블라이저택에서 평온을 얻는 듯하는데... 어느 날 전임 가정교사 미스 제셀과 독신남의 하인이었던 피터 퀸트가 나타나면서 이 소설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결말! 이 결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했는데, 이 글을 읽은 다른 독자들도 각자 다르게 판단하더라.

난 가정교사가 아이들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유령의 모습이 너무 구체적이다. 마일즈도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하다. 가정교사의 정신착란인지 빙의인지, 아니면 아이들이 빙의된 것인지, 이것도 아니면 유령 저택에 멀쩡한 여인이 머문 것인지!

제목이 나사의 회전, 원제는 The turn of the screw이다. 나선형 홈을 파면서 내려가다 보면 어떤 진실을 마주칠 수 있는 것이까? 과연 명확한 진실은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다 믿을 수가 없다.

나처럼 겁 많은 사람이 밤에 읽고 침대에 누우면 조금 무서울 수 있으니 밝은 낮에 읽은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결말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더 검색해 보아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멸종을 추적하다 보면 늘 동일한 범인, 인간을 만나게 된다.

<앞표지> 중에서

여섯 번째 대멸종은 201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며, 2015년 퓰리처 논픽션 부문에 수상되었다. 2014년 한국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된 적이 있다. 최근 인간과 환경, 탄소 배출과 지구 생물의 멸종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여섯 번째 대멸종>이 새로운 출판사와 번역가, 감수자에 의해 재출간되었다. 감수자는 생태학자로 유명한 최재천 교수이다.

저자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언론인이자 작가로 뉴욕타임즈, 뉴요커에서 일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이 보던 어린이 과학잡지에서 의문을 품고, 파충양서류학자의 논문에서 현실을 알고, 사실관계를 파악하고자 개구리를 관찰하러 파나마로 떠난다. 그리고 다양한 취재와 추적을 통해 이 책을 만든다.

지구는 수차례의 작은 멸종과 다섯 번의 큰 멸종을 맞았다. 다섯 번의 큰 멸종은 화산활동, 지구의 온도 하락(빙하기), 운석 충돌 등 자연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이로 인해 공룡과 같은 몸집이 큰 동물들이 멸종하였다. 하나 상대적으로 작은 동식물들은 절멸하지 않았기에 큰 멸종 후에도 이를 먹이로 한 몸집이 큰 다른 동물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여섯 번째 멸종은 작은 동식물들부터 절명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섯 번째 멸종은 자연적이고 불가항력적이지 않다는 것일까?

다섯 번의 큰 멸종 사이에는 긴 시간이 존재한다. 그래서 인류가 여섯 번째 큰 멸종에 대해 안심하고 있다면? 이 책은 여섯 번째 큰 멸종은 자연현상이 아닌 인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인류세 (Anthropocene, 人類世)>이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전 지구로 뻗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DNA 구조가 유사한) 형제인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 등을 멸종시켰다. 물론 사피엔스는 그들을 절멸시키기 전에 그들과 결합해 자식을 두기도 했다. 그래서 현생 인류의 DNA에는 그들의 DNA도 적게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피엔스는 형제를 죽였고 다른 종족들도 죽였고 죽이고 있다.

자연상태에서는 큰 동물은 생존에 유리했다. 어린 시절만 잘 버티면 코끼리, 하마, 거북이 등은 몸집이 매우 커져 육식동물도 쉽게 노릴 수 없는 동물이 된다. 그러나 인류는 그들의 몸집 크기와 상관없이 초기에는 돌과 창으로 사냥하여 죽였다. 지금은 더 업그레이드된 총과 같은 무기로 대형동물들을 사냥한다. 실제로 많은 대형동물들이 그렇게 죽었다. 먹기 위해서도 있지만 상아 때문에, 가죽 때문에, 인간의 용맹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자연상태에서는 (철새의 경우 장거리 비행을 하나) 일반적으로 동식물의 대륙 간 이동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인류는 이들을 배나 비행기에 태워 다른 대륙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타 대륙의 동물들(여기서는 양서류, 특히 개구리에 대해 주로 언급한다)을 죽인다. 일부 학자들은 (일부) 대형 멸종 동물의 경우 임신기간이 길고, 한 번에 낳는 새끼의 수도 적기 때문에 절멸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 보면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와 같은 문제로 보인다. 사람 때문에 개체 수가 줄어들어 결국 출산할 수 있는 동식물 수가 줄어든 건지, 출산할 수 있는 동식물 수가 줄어들었는데 사람들까지 끼어들어 죽인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도 동식물 멸종에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건물이 없어지면 입주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p207 <CHAPTER 7 중독된 바다_이스라엘 과학자 잭 실버먼> 중에서

인류는 산업화 이후 200여 년간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대기 중 탄소 농도를 높였다. 이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고 이는 동식물의 터전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대기 중 탄소는 물과 결합하여 바닷물의 산도(PH)를 PH8.2에서 8.1로 점점 산성화시키고 있다. 여러 실험을 거쳐 산도가 7.8이 되면 바닷속 생물들이 많이 멸종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탄산 칼륨이 녹아 산호가 죽고, 산호군집이 죽으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동식물들도 살 수 없다고 한다. 생활 속 배경음악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멸종되는 배경 멸종을 기대했으나, 지금 많은 동식물들이 눈앞에서 절멸되는 대량 멸종이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의 감수를 맡은 최재천 교수도 자신의 한 종의 멸종을 눈으로 경험하였다고 밝힌다(일반적으로 알려진 명칭이 아닌 가위 개미, 고함 원숭이라고 번역된 부분에서 최재천 교수의 감수가 느껴짐).

그러나 갇혀 있지 않은 거의 모든 곳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대형 포유류들은 곤경에 처해 있다.

p313 <CHAPTER 11 코뿔소에게 초음파 검사를> 중에서

지구 종의 절멸은 인간의 절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인류는 인류세가 오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광기의 유전자를 지닌 현생 인류가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노력을 얼핏 보여준다.

자연부화가 어려운 종을 실험실(공원, 동물원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장소)로 데려와 인공부화를 시켜 종의 개체 수를 늘려준다. 경비행기 운전자가 실험실에서 태어나고 키워진 야생성 없는 새들을 위해, 새들의 비행을 도와준다. 함께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간다. 환경단체에 기부를 하고 동물들이 자신의 땅에서 쉬고 갈 수 있게 협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한다. 다양한 연구자들이 탄소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발생될 재해에 대해 무섭게 경고하여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 보기도 한다. 저자가 언론인이고 작가인 만큼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위트 있게 이야기의 강약을 조절한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멸종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다.

엄마는 어릴 적에 바닷가 시골마을에서 자랐다. 어느 날 큰 거북이 모래사장으로 넘어온 적이 있는데 엄마를 비롯한 어린이와 마을 어른들이 신나게 모여 거북이를 봤다고 했다. 마을 어르신 중 한 분이 거북이에게 (아마도 목 축이고 가라고) 막걸리 한 사발을 먹이고 사람들은 거북이 바다로 보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지막 남은 큰바다쇠오리를 사냥해서 판 사람들이 떠올랐다. 거북이를 바다로 보내준 그분들처럼 그냥 큰 바다쇠오리를 놔뒀다면 큰바다쇠오리의 멸종 시기가 조금 더 늦춰지지 않았을까 싶다.

(쌤앤파커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서 '카즈무후'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말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별명이다. '동'은 귀족 냄새를 풍기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p8 <제1장 표제에 대하여> 중에서

동 카츠무후(Dom Casmurro)는 포루트칼어로 무뚝뚝 경, 퉁명 공이라는 뜻이다. 노란 표지에 독자를 바라보는 눈 하나가 인상적이다. 관음증이 있는 사람인 걸까, 아니면 어딘가 갇혀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 살려달라고 쳐다보는 것일까.
표지도 인상적이지만, 출판사 소개 글에 <브라질의 문호가 쓴 1899년에 쓴 소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닮은 소설, 옆집 남자와 닮아가는 아들>이라는 내용이 있어 책 내용이 몹시 궁금하였다. 오셀로처럼 간신의 이간질이 나오려나, 오셀로처럼 주인공도 아내를 직접 죽이려나 궁금해하며 책을 읽었다.

이 이야기는 중장년이 된 벤투 산치아구(애칭, 벤치뉴)가 40년 전 여자친구이자 장래의 부인이 될 카피투와 사랑에 빠지게 된 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벤투 산치아구는 모든 사람들이 도련님으로 부르는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이다. 아빠 페드루 지 아우브케르키 산치아구는 농장과 노예를 소유하고 있고, 엄마 마리아 다 글로리아 페르난지스 산치아구는 신앙심이 높은 사람이다. 첫번째 아이가 사망하자 두 번째 아이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교회로 보내 사제로 만들겠다고 신께 약속한다. 딸일 경우 사제가 될 수 없어, 엄마는 딸을 원했으나 결국 아들인 벤치뉴가 태어난다. 벤치뉴가 어린아이였을 때, 엄마가 31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산(아홉채 이상의 집과 많은 노예들)이 많아 벤치뉴는 여전히 풍족하게 자란다. 집에는 주제 지아스라는 쉰 중반의 집사 같은 객식구가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집안의 노예들을 치료해 줘서 아버지 사후에도 숙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아버지는 주제 지아스가 의사인 줄 오해했으나 그가 의사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또한 집에는 다른 객식구도 둘이나 더 있는데 엄마의 사촌 주스치나 당이모와 형법전문변호사인 코즈미 삼촌(엄마의 오빠)이다. 코즈미 삼촌에게는 친구 카브라우 신부가 있고 이 신부에게 벤치뉴는 라틴어와 교리를 배웠다.

한편 옆집에는 거북이라는 별명을 가진 파두아와 그의 아내 포르투나타 부인, 벤치뉴 보다 1살 어린 카피톨리나(애칭, 카피투)가 살고 있다. 파두아는 복권 당첨의 행운을 얻었다! 파두아는 벤치뉴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며 산치아구 집안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약속을 하려고. 약속해, 내 첫아이의 세례는 너에게 부탁할게.
p133 <제44장 첫아이> 중에서

책의 1/3이 지나도록 오셀로와 닮은 소설, 옆집 남자를 닮아가는 아들에 대한 내용이 안 나온다. 10대 소년 소녀의 풋사랑 이야기만 나와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제45장 독자여, 고개를 저어라>편에서 지루함에 책을 버리고 싶었던 적이 없다면 이참에 이 책을 버려도 된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진짜로? 생각했는데 저자는 조금만 더 참고 읽어보라고 나를 토닥인다. 진짜 작가와 밀당하는 것처럼 다시 읽어나갔다.

옆집 카피투와 장래에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고, 신학교를 피해보려고 했으나 벤치뉴는 결국 엄마와 주변 사람들의 성황에 결국 16세가 되는 1858년 성요셉 신학교에 가게 된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있었던 추억을 되뇐다. 신학생 에제키에우 지소자 에스코바르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이의 이야기를 한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벤치뉴는 카피투와 결혼하고, 에제키에우는 산샤와 결혼한다. 그러나 벤치뉴의 자신의 아들이 에제키에우와 닮은 것 같아도 의심하면서 이야기는 불행으로 치닫는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카피투가 에제키에우와 밀회를 즐겼고, 카피투가 벤치뉴를 속여 에제키에우와 똑닮은 아들을 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피투는 나쁜 여자이고, 벤치뉴는 평생 순정을 바쳤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카피투 유죄, 벤치뉴 무죄!

그러나 임소라 번역가의 해설을 보면 왜 이 소설이 오셀로를 닮았는지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벤치뉴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다. 우리는 카피투의 이야기와 다른 이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들어본 적 없다. 카피투를 법정에 세운 것도 벤치뉴, 이야기를 하는 것도 벤치뉴이다. 심지어 벤치뉴는 법학을 전공한 유능한 변호사이다. 벤치뉴는 오셀로를 보면서, 그깟 손수건으로 부인을 의심하는 오셀로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카피투의 외도는 분명하다고 밝힌다.

똑같은 사건도 사건의 이해당사자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한다. 책을 다 읽고 꼭 해설을 읽어보길 바란다. 브라질 사람들이 가장 사람하는 고전이라고 하니 브라질 문학에 관심있거나 남미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공들여 읽어볼만하다.

(휴머니스트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관리의 죽음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고정순 그림, 박현섭 옮김, 이수경 해설 / 길벗어린이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안의 불안에게(들어가는 말 중에서)


안톤 체호프의 단편 중 하나인 <관리의 죽음>을 어린이들도 읽기 쉽게 길벗어린이 출판사에서 그림책으로 만들어 출간하였다. <관리의 죽음>은 전에 읽은 적이 있어 내용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이하, '이반'이라고 함)의 내면과 외면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지 궁금하고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이수경님의 작품해설도 들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관리의 죽음>은 짧은 단편소설이다. 회계원인 이반은 어느 날 저녁 공연을 보다가 크게 재채기를 하는데, 하필이면 그의 침이 사내 타부서장인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튀었다. 장군은 투덜대며 그의 대머리 위에 묻은 침을 연신 닦고 이반은 장군에게 거듭 사과한다. 장군이 알겠다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자신의 사과가 미덥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반은 또다시 사과한다. 장군이 계속 알겠다고 무뚝뚝하게 대답하자 이반은 장군의 사무실에까지 가서 찾아가 거듭 사과한다. 장군은 사무실까지 찾아온 이반에게 화를 내고 이반은 집으로 돌아와 소파 위에서 사망한다.

이반의 즐거운 감정, 놀란 감정, 좌절된 감정 등이 고정순 작가의 연필선으로 잘 표현되었다. 특히 이반이 좌절할 때 이반의 꺾인 목과 화분의 화초가 옆으로 꺾인 모습이 이러한 감정을 잘 나타낸다.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장군이 화를 냈다고 그게 뭐 이반이 급사할 정도로 큰 일인지 의아했다. 안톤 체호프 단편집의 등장인물들이 어이없이 죽는 경우 왕왕 있어서, 별것도 아닌 걸로 급사하거나 살인을 하면 지구상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큰일 보다는 사소한 일과 사소한 결정으로 다툼이 일어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서두에 <내 안의 불안에게>라는 말이 말풍선에 써져있다. 이수경 교수는 이반의 모습을 <사소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다>라고 해석했다. 소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실제 있었던 일보다 크게 느낄 수 있다. 이반은 장군에게 사과하지만, 장군에게 있어 그 일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작은 해프닝 같은 것이다. 그냥 투덜대고 머리에 침만 닦으면 잊혀질 일인 것이다. 그 후 공연에 집중하고 싶은데 이반이라는 사람이 공연에 집중도 못하게 거듭 사과한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사과한다면 슬슬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짜증에서 분노로 발전할 수도 있다

.

우리가 소극장에서 연극을 본다고 생각해 보자. 공연 중 누군가의 휴대폰이 실수로 울렸고 그 분이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사과를 한다. 관객과 배우들은 순간 짜증이 났을 수도 있지만, 사과를 했으니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빨리 공연에 집중하고 싶어서 조용히 하는데, 실수한 사람이 거듭 큰 소리로 사과한다면 어떨까? 공연이 끝난 후 대기실로 찾아가 배우들에게 일일이 사과하고, 공연장 입구에서 관객들에게 일일이 악수하며 사과한다면? 나라면 이반과 같은 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할까, 왜 마음을 불편하게 할까...... 더 화가 날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반 보다는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이 쓰여진 시대와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다른 부서의 부서장에게 실수를 하였고, 그로인해 나의 사내 평판이 악화되고 생계가 위협된다면 나조차 브리잘로프 장군에게 확실히 사과하고 확신한 대답을 듣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약한 부분, 불안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이를 잘 다스리고 균형을 맞춰야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감상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