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받고 읽으면서 시대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액체근대'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는데 이책은 본인이 쓴 글이 아니기에 위인전 형식을 빌어쓴 자서전 같은 형식이다. 한사람의 생애들이 모여서 역사를 이루듯 격동의 세월을 살았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생애를 읽으면서 아픔이 있는 우리나라의 근대사의 전쟁 전후의 상황이 생각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태백산맥의 빨치산, 독립운동 당시의 상황이나 해방 후의 대한민국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이 책에 나오는 민족이란 무엇이고 국가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은 목차가 없다. 찾아보기가 참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유대인을 거부하는 폴란드에서 폴란드 국민이 되고자 하는 정체성 찾기와 2번의 난민같은 생활을 하게된 과정과 결과가 나오고 2차대전의 과정과 종료후에 행했던 활동과 영국에서의 생활과 은퇴 후의 생활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내용이 과다하고 자료가 정말 많기에 내용을 파악하는데 정말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작가가 정말 많은 자료의 수집과 인터뷰등 내용을 보면 그 과정이 나오는 듯 할만큼 정말 지그문트 바우만에 대한 많은 자료와 인터뷰내용들이 실려 있기에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사상가의 전 과정을 낱낱이 눈에 보는 듯 선명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시대가 만든 아픔을 모두 안고 생존을 위해 바우만은 평생 두 번 난민이 되었다. 한 번은 1939-1944년, 다른 한 번은 1968년이었다. (14페이지) 2차대전 발발로 인하여 러시아 (구소련)으로, 한번은 조국이라 믿었던 폴란드의 포그롬(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이스라엘로 간것을 말한다. 격동하는 아픔의 시대를 대변하면서 난민이 되었다. 좋게 보면 일관성이 있고 자신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믿고 책임이 확실하지만, 나쁘게 보면 고집이 정말 세고, 시대의 흐름을 잘 못읽고, 자신의 선택을 옹고집처럼 내릴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왜 그런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책의 큰 줄거리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실질적으로는 폴란드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과정을 살펴 보아야 할듯 하다. 온 갖 핍박과 학대 및 민족의 학살을 경험하고서도 버리지 못한 그 정체성을 찾는 여행을 하여야 할 듯 하다.
정체성 자각(나는 누구인가?)과 '주된 지위(master status)'(남이 나를 어떻게 인지하는가?)는 이 책을 가로지르는 두 축이다. 여기서 나는 1945년에 '주된 지위'라는 개념을 제시한 시카고대학교의 뛰어난 사회학자 에버렛 휴스(Everett Hughes)와 생각을 같이한다. 휴스는 타인이 규정하는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주된 지위'를 이용해 정의한다. 어떤 사회적 역할에 필요하다고 기대하는 특성이 없는 누군가가 그 역할을 맡으려 할 때 그 지위는 부정된다. 이런 상황은 차별받는 집단에 속한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거나 차지하려고 할 때 흔히 벌어진다. 폴란드에서 산 대부분 동안, 바우만이 생각한 정체성(폴란드인)과 주변에서 강요한 주된 지위(유대인)가 계속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지위는 유대인이라는 출신에서 비롯했다. (14면) 이 책의 주요 이슈와 축으로서 저 말없이 이 책이 전개 될 수 없는 것이다.
바우만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본주의는 사회관계, 사랑, 규칙, 도덕성, 가치관을 '유동'시켰다. 끝임없이 발전하고 진전한다는 인식때문에 한때는 견고했던 '근대' 사회의 절차와 규정이 이제는 새로운 것, 가장 나은 해결책, 혁신을 위한 혁신을 선호하는 특징을 보이며 유동했다. '유동'한다는 느낌, 일시성과 부족한 안정성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었다. "유동하는 세상(Liquid World)'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바뀌어, 삶이 잠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유동하는 시대(Liquid Times)'는 불확실성이 특징이다. 활발히 변동하는 유동성은 사회관계를 바꾸고, 따라서 사회관계를 망가뜨린다.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깊은 외로움에 빠진다. 인생전반기에는 한때 사회주의 전파자료 활동해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자 참여하는 과정에서 여러 교훈을 얻었고, 인생 후반기에는 냉혹한 몰입과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사람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바우만은 사회 정의를 꿈꾸었던 이상과 가치관을 지키면서도, 고귀한 목적을 표면에 걸고 새로 생성중인 체제를 날카롭게 분석하였다.(15~16페이지) 폴란드가 버리고, 생존을 위해 선택한 이념의 장이었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바우만을 버렷지만 바우만은 끝까지 폴란드를 버리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버리지 않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책을 이해 하려면 위에 나오는 문장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내용을 증명하기 위하여 책의 내용은 전개 된다.
바우만은 유대인이었지만 부모도 생활은 유대인처럼 시온주의를 믿는 분들이지만 종교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원론주의를 지향하고 생활에서는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바우만에게는 살아 있는 지성이었다. 어머니의 교육철학을 보면 유대인의 생활과 가르침의 모든 것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바우만은 자신을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으로 인식했다. 2차대전이 시작하기전 독일등에서 시작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 바우만이었고, 조국이라 생각하는 폴란드에서도 같은 경험을 당하고서도 바우만은 폴란드를 선택하였다. 유대계 프랑스인이나 유대계 미국인이 될 수 있어도 유대계 폴란드인 같은 존재는 없었다. 그러니 폴란드의 유대인은 둘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유대인이거나 폴란드인인거나.(22페이지) 1939년 2차대전이 일어나고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독일을 피해 가족과 함께 소련 땅으로 들어간 바우만은 생존을 위하여 공산주의를 받아들인다. 공산주의는 그에게 민족과 인종에 따른 차별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던 것이었다. " 차별을 멈추자. 모욕을 멈추자. 이것이 공산주의가 전 후에 내건 약속이었다. 전후 체제에는 이런 약속을 실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지 않을 요소가 있었다. (228페이지) 공산주의 정권은 혁명이 무르 익을 수록 계급투쟁의 결롸로 반 유대주의가 안정되어 줄어 든다고 봤다.( 229페이지) 전쟁 전 후에 이러한 약속은 핍박과 압박을 당하던 바우만에게는 종교의 교리같은 말들이었고 행동이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버리 못하였다.
전쟁을 끝나고바우만의 약점이라고는 없는 정직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우만은 차별과 억압이 없는 해방된 폴란드에서 살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돌아 왔지만 유대인을 받기는 것은 차디찬 환대와 배신을 당했다. 새루운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한 공산주의 활동에 모든 것을 걸었다. 살기위해서 본인이 원하는 국가를 선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걸었다. (183페이지 개인해석)
국내보안대의 활동이 바우만의 발목을 잡지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폴란드인 바우만은 나이 스물에 폴란드군 장교가 되엇다. 전쟁 전 폴란드군에서는 반유대주의 때문에 불가능했을, 보기드문 승진이었다. 그러니 바우만은 틀림없이 자신이 진짜 폴란드인으로 인정 받았다고 느꼇을 것이다. 폴란드군 장교는 바우만이 그야말로 애지중지한 폴라드인다움의 정수였다. 이제 지그문트 바우만은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폴란드 시민이었다.(177페이지)
참 눈물 나는 장면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정말 이지 사람이 이렇게 종교처럼 내려놓지 못하고 인정받으려는 그 과정을 생각하면 눈물나는 장면이다.
줄여쓰는 것이지만 작가가 정말 많은 자료를 가지고 풀어쓴 내용이라 줄여도 줄인것 같지가 않다.
개인적으로는 선호하는 정치가는 아니었던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하에서 바우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회의감을 품으면서 또 이야기는 전개된다. 가장 큰 신호탄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념을 같이 하고, "스승이자 동료였던 호흐펠트의 죽음으로 바우만은 스승이자 친구를 잃었을뿐더러, 보호자도 잃었다." (398면) 이념적 동지였던 호흐펠트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스탈린주의와 폴란드의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바우만은 "수정주의"로 낙인되어 생활에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주도권을 장악한 고무우카는 모든 포그롬과 같은 목적 즉 유대인 추방을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대인이 아닌 '시온주의자'라는 용어를 썼지만, 효과는 마찬가지였다. (432면) 사회는 주류와 비주류가 있는데 지식인으로서 주류에 있다가 이제 비주류로 밀려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다가 또 한번의 소용돌이를 거치게 된다.
주류가 된 고무우카 정권이 반 유대주의를 선동하여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하여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였다. 1968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처럼 바우만은 이제 적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위를 하고 경제는 어렵고, 각종 소요사태등의 원인을 유대인들의 잘못으로 선동하면서 바우만은 포함한 유대인들은 갈곳을 잃어 버렸다. 선택의 폭은 죽음이냐 떠나느냐일 뿐이다. 국가 포그롬(유대인 학살)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바우만은 이스라엘로 향한다.
안타깝지만 바우만은 이스라엘에서도 '유대인'도 아니고 이스라엘 국민도 아니고 그냥 이방인이었다. 바우만이 말했던 이방인은 그 사회의 미결정이고 아직 익숙치 않은 사람을 이방인으로 다른 책에서 한것을 본적이 있다. 고향 같은 이스라엘에서도 결국은 주변인으로 정체성을 찾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영국 리즈대학교로 가게 된다. 행복한 나날들의 연속이고 직위나 사회에서는 인정받는 단계로 올라지만 바우만은 행복한 그 세월도 결국은 이방인이고 주변인이었다.
1989년 폴란드의 민주화로 인하여 바우만은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을 것 같은 폴라드로 다시 갈수 있었다. 1968년도 폴란드를 떠나면서 공산당에서 탈퇴하고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갈아 타고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세월은 그렇게 흘렀다. 변화된 폴란드는 이제 국내보안대와 공산당 경력을 문제 삼아 바우만을 괴롭혔다.시대의 흐름은 변화하고 달라지지만 모든 것은 고리처럼 바우만을 괴롭히고 사회학자이고 폴란드 국민이 되고 싶은 그의 장애물을 공권력과 제도가 첩첩산중으로 걸림돌이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바우만이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하였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를 지지하는 않는 국가, 억압과 학살을 일삼는 국가, 추방을 밥먹듯이 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국가에 국민이 되려고 하는 그 마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여 보게 된다. 유대인이면서 폴란드 국민이 되는 과정, 사회주의 운동가의 진정한 삶을 배워보는 기회였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부분이 결국은 이 책이 일러주는 바우만에 대한 키워드인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