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제자라고 하여 모두 사리불이나 목건련, 마하가섭처럼 세세생생의 인연과 훌륭한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특히 6군 비구라 불리는 일련의 비구들은 서로 모여 수행과는 어긋난 일을 골라하곤 했다. 이들의 행동과 그에 대한 결과로 인하여 ‘비구로써 해서는 안 될 일’들이 ‘계율’로 정해지게 되었다.

아난으로부터 발우 공양을 받다
이 6군 비구들이 어느 날 탁발에 필요한 발우를 수집하는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당시 발우는 크게 쇠로 만든 것과 옹기로 만든 것 두 종류가 있었고, 모양이며 색깔 등이 각각 조금씩 달랐다. 이 6군 비구들이 날마다 이 발우를 종류별로 모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출가자에게 사유재산이란 있을 수 없었고, 탁발과 걸식으로만 생활하는 교단에서 취미삼아 발우를 모으는 것은 수행자의 정신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발우를 비롯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을 금하는 계율을 정하셨고, 이를 어길 시에는 교단에서 내쫓도록 했다.

바로 이 시기에 아난은 지극히 귀한 소마국 발우를 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발우를 받자 마하가섭에게 선물하였다. 이 사실을 아신 부처님께서는 곧바로 마하가섭을 불러 아난이 선물한 귀한 발우를 ‘발우가 없는’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분부하셨다. 소마국 발우처럼 귀하지는 않지만 마하가섭에게는 이미 쓰고 있는 발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난으로써는 부처님의 뒤를 이을 마하가섭에게 그에 마땅한 좋은, 존귀한 발우를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발우를 계기로 부처님께서는 계율의 엄격함을 공고히 알리는데 활용하셨다. 마하가섭은 두말없이 부처님의 분부에 따랐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는 평생 두타수행을 하며 고행과 무소유를 몸소 실천하였으니 실로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마하가섭의 미친 존재감
마하가섭은 부처님을 대신하여 재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기도 하고, 부처님이 자리를 비우셨을 때 주지 소임을 맡기도 했지만 주로 홀로 수행하기를 좋아했다.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님을 살뜰하게 모시며 교단을 지도했고, 부처님은 몸소 많은 일들을 직접 결정하시며 교단의 화합과 계율을 만들며 기틀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마하가섭은 등장하지 않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는 베르바나(죽림정사)나 아나타핀디카(기원정사) 같이 많은 이들이 머무는 곳에 있지 않고 홀로 숲이나 무덤 사이, 나무 아래 등에서 수행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가섭에 대한 부처님의 신임은 두터웠고, 사리불과 목건련은 아무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는데 그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에 부처님을 대신하여 교단을 이끌어 갈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은 부처님과 마하가섭 사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사리불과 목건련 역시 말하지 않아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그것을 헤아려 실천했던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교단을 지도하시는 한, 자잘한 일에는 일체 상관을 하지 않았기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마하가섭의 말은 천금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마하가섭이 대중들이 많은 곳에 함께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감이 미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미친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부처님이 설법을 듣기 위해 구름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영축산에서 모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부처님은 입을 열지 않으셨다. 그러다 문득 옆에 있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시니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저 뒷줄에 있던 마하가섭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에 부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주 미소 지으며 드디어 입을 열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있는데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이로부터 말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지극히 우아하고 신비로우며 철학적인 ‘텔레파시’를 이르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한 번의 미소로 마하가섭의 존재감은 영원불멸의 것이 되었고 이 미소로 말미암아 그는 선종(禪宗)의 시조(始祖)로도 자리매김하였다. 마하가섭의 미친 존재감을 전하는 것은 이 뿐이 아니다.


마하가섭을 향한 부처님의 사랑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기 전, 교단 내에서 마하가섭의 권위를 확실하게 세워놓기 위해 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독재자가 권력을 세습하기 위해 기반을 닦아놓은 것만큼이나 효과적이다. 공공연하게 마하가섭을 편애하는 부처님의 말씀과 행동은 자애롭기 그지없으나 그만큼 절대적이다. 두타수행과 무기한 잠적이라는 마하가섭의 특기는 때로 그의 존재감을 화려하게 부각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가장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으니 바로 부처님이시다.

제자와 신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경우 짝사랑하듯 부처님‘을’ 애틋하게 존경하고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마하가섭은 이 관계를 반대로 하여 긴장감을 높인다. 그리하여 이런 배경이 탄생한다. 어느 때에 부처님이 못 본 지 오래 된 마하가섭이 너무나 그리워 마음으로 그를 불렀다. 이미 영축산에서도 텔레파시가 통했던 두 분이 아니던가. 마하가섭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당장에 부처님의 부름을 알아차리고는 그대로 스승을 향해 달려간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실을 빼고 보면 이런 러브스토리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그를 보고 싶어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부터가 벌써 교단에서 그의 위상이 얼마나 특별한지, 부처님이 그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준다.

부름을 받은 마하가섭은 자신의 남루한 차림새도, 길게 자란 머리와 수염도 전혀 개의치 않고 부처님을 향해 달려온다. 규율에 맞춰 교단에서 단정하게 수행을 하며 규칙적으로 생활을 하던 ‘정상적인’ 비구들은 웬 걸인이 부처님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길을 막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걸인을 향해 손짓을 하고는 그가 다가오자 앉아 계시던 자리의 반을 내준다. 마치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듯,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걸인을 맞이하는 부처님을 보면서 그때서야 비구들은 그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이름 높은 마하가섭임을 깨닫는다. 얼마나 효과적인 컴백인가. 비구들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는 이미 성공했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더해진다.

“마하가섭은 광대무변한 위엄과 덕을 갖추었으며 나와 비슷한 수도의 과정을 거쳐 혼자서라도 충분히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느니라.”

마하가섭이 어떤 존재인지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부처님의 말씀은 2500년이 지난 지금 보더라도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이다. 이처럼 마하가섭과 부처님은 죽이 잘 맞았다. 마하가섭은 결코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서두르지 않았고 침묵을 충분히 활용하였다. 그것이 어떠한 말보다 더욱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영축산에서도 미소 한 번으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마하가섭이 침묵을 즐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침묵해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침묵의 힘이 있었기에 훗날 마하가섭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은 천금의 효과를 지닐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마하가섭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실로 사자의 포효처럼 커다란 울림이 되어 교단을 지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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