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불과 함께 부처님의 상수제자였으며 평생을 함께한 도반으로써 죽는 날까지 남달리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주었던 목건련(Maudgalyāyana)을 생각할 때면 항상 함께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유백아와 종자기, 관중과 포숙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 역시 사리불과 목건련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드라마틱한 사연과 깊은 우정을 보여주었다. 인과(因果)를 생각했을 때 혹시라도 이들이 전생의 인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아쉽게도 이들은 활동한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억지로 엮어보려던 마음을 접고 나자 새로운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활동시기가 아닌 활동분야였다. 유백아와 종자기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약하였고, 관중과 포숙아는 사회정치 분야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고 보면 사리불과 목건련은 종교철학 분야에서 활약한 우정의 대표주자인 셈이다. 기원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처럼 고매한 분야에서 우정이 피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다.

목건련은 사리불과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출가하여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수행하다가 길에서 부처님의 제자인 아사지 비구를 만난 사리불의 권유를 받고 동시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에서 귀의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사리불의 이야기에 거의 다 나와 있다. 따라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기 보다는 목건련과 사리불의 이야기와 닮은, 멋진 남자들의 이야기를 살짝 엿보면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아
관중(管中)과 포숙아(鮑叔牙)는 기원전 7세기 춘추전국 시대 사람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려 지냈는데 특히 포숙아가 먼저 관중의 현명함과 뛰어남을 알았다고 한다. 역사적 기록을 보았을 때 관중은 확실히 비상한 두뇌와 재주를 타고나긴 했으나 몹시 빈곤한 집안의 자제였던 것 같다. 커서 두 사람은 친구 사이는 물론 친족 사이에서도 피하는 것이 좋다는 동업을 했다. 동업은 물론 시작부터 불안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 관중은 포숙아보다 출자금을 적게 냈다. 그러나 출자금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를 통해 생긴 이익은 항상 똑같이 나눴고 심지어 포숙아는 관중에게 모자라지 않는지를 묻기도 했다.

이런 배려 속에서도 관중의 가난함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고 이런 일들이 오래되고 계속되며 잦아지자 관중은 포숙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방’을 터트리기 위해 몇 번이나 사업을 벌였다가 망하기를 되풀이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과 한탕주의는 참으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이 확실하다. 게다가 그 ‘한 방’을 위한 투자금 대부분은 포숙아의 돈이었다, 하지만 포숙아는 번번이 투자금을 날리면서도 한 번도 관중을 원망하지 않았다.

사실 친구 사이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 돈거래만은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관계에 있어서 ‘돈’에 대한 문제는 매우 민감하다. 매번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라며 친구 관중을 믿어주는 포숙아의 행동에 관중의 가족들은 얼마나 민망했으며, 포숙아의 가족들은 얼마나 얄밉고 짜증이 났을까.


가시밭길 정치인생을 비단길로 바꾼 우정
그 후 관중은 세 차례 벼슬길에 올랐는데 세 번 모두 파직되었다. 타고난 빈곤한 환경과 사업의 실패, 계속되는 해고 및 막막한 취업까지 이정도 되면 아무리 어린 시절 총명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운이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생의 실패자라 할만하다. 하지만 포숙아는 매번 파직될 때마다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라며 관중을 위로했다. 이 인생의 실패자가 파직 후 향한 곳은 전쟁터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쟁이 일어났던 춘추전국 시대에 관직에서 쫓겨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난한 남자가 갈 곳은 군대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관중은 이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목숨을 아꼈던, 언젠가 올 기회를 여전히 기다리던 그는 세 번 참전했다가 세 번 모두 도망하였다. 이 질긴 버러지 같은 관중의 삶을 사람들이 욕하자 포숙아는 그를 감싸며 ‘보살펴야 할 늙은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그처럼 잦은 전쟁 속에서 포악한 정치가 계속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결국 각자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되었고 다른 나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제나라의 왕이 피살되자 관중이 소흘이라는 사람과 함께 섬기던 왕자 규와 포숙아가 섬기던 소백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다가 만나고야 말았다. 관중은 자신의 주군인 왕자 규를 한시라도 빨리 왕위에 올리기 위해 거침없이 소백에게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은 소백의 허리띠를 맞췄을 뿐 목숨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백은 계락을 써 마치 죽은 것처럼 꾸민 채 관중 일행의 움직임을 늦추고는 재빨리 제나라로 가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고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몰고 와 관중과 왕자 규의 세력을 단숨에 제압하였다. 왕자 규는 크게 패하여 노나라로 돌아갔으나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자 규의 죽음을 본 소흘은 자살을 선택했다. 관중 역시 책임을 져야 했으나 죽기를 바라지 않아 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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