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저항 -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이라영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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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을 살고 있는 지금, '진지'라는 단어는 썩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요즘은 진지하면 욕먹기 일쑤다. 최근의 단어도 아닌 '진지충'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 요즘은 벌레 취급당한다. 가볍고 유쾌해야 한다. 

인터넷 문화와 만나며 더더욱 이런 분위기는 가속화 되었고 많은 사람도 이제 그부분에서 많이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회사내의 상사가 분위기 푼답시고 시덥지 않은 야한 농담따위는 별개다.)

지나친 엄숙주의를 타파해야 한다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딱딱할 것만 같은)사회운동에서도 (재미없을 것 같은) 정치적 행동을 할때도 재미를 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 

힘든과정들을 유쾌하게 이겨나가자라는 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사회운동도 재미있어야 하고, 정치도 재미있어야 하고.

재미를 추구하는 시대다.


심지어 JTBC에서는 악플을 소재로 한 예능까지 나왔다. 

악플을 미화하려는게 아닌 댓글문화 속에서 이해해보자라는 취지라고 한다. 

이러한 소재는 유튜브에서는 이미 유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외모비하,혐오적인 발언이 넘쳐나는 악플을 읽으며 당사자가 의연하게 대처하면 대인배적인 풍모로 보여지고 쿨하다라고 인식하면 깔끔하게 끝이 나는 걸까? 

이게 발전적인 건지는 모르겠다. 혐오적 표현을 그대로 보여주며 그냥 재미로 웃어넘기면 혐오주의가 넘쳐나는 것이 사라지나?

생각해보니까 너무 '재미'만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어버리면서 재미로 포장된 혐오표현조차 품어야 남들한테 욕을 안먹는 지경까지 오는 것 같다.


이렇게 뭐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뭐가 잘못된것인지 생각의 정리는 안되고.. 그 와중에 이 책『타락한 저항』을 읽게되었다.


 진지함은 참되다, 솔직하다, 신중하다는 의미다. 사물과 세계, 존재를 들여다보고 생각하며 의구심을 품는 태도다. 이러한 진지함이 부정될 때 유머의 질도 하락하기 마련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타인의 수치심을 재료 삼은 유머(라는 이름의 차별 발언)에 익숙해진다. 진지함에 낙인을 찍는 언어의 증가는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경멸이 점점 만연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진지함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지함이 위선이 되면 의구심과 회의를 표출하기 어려워진다.

(p. 9)


"충은 몸 안팎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소변, 대변 역시 몸안에 있지만 늘 바깥으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내부자가 아니라, 주변인 혹은 경계에 있는 존재들에 의해 표현된다." 바로 '진지충'이라는 언어는 이 사회의 지성이 처한 경계인의 위치를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일은 피곤하다. 독설, 조롱 혹은 감정에 극도로 호소하는 신파가 더 쉽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각의 범위뿐 아니라 감정의 영역도 협소해진다. 감정에 호소하는 사회일수록 오히려 감정은 풍요롭지 못하다. 감정의 정답을 만들기 때문이다.

(p. 9~10)


저자인 이라영은 서문에서 진지함에 낙인을 찍는 언어의 증가가 지식에 대한 조롱과 경멸이 만연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독설, 조롱보다 문제를 인식하고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피곤하다. 

이렇게 가는 것이 좋은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걸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 후반까지 이어진 2명의 보수대통령이 집권했던 시절 많은 사람들을 옥죄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원 댓글, 문화계 블랙리스트등의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었다. 박근혜대통령은 결국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탄핵을 받게 되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가 된 후 국회 로비에는 시국을 비판하는 전시가 열린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정치적 탄압에 저항의 의미였다. 그 중 하나의 작품이 문제가 되는데 <더러운 잠>이라는 작품이다.


박근혜를 비판하는 듯 보이는 <더러운 잠>은 실은 '여성'대통령을 바라보며 자신의 남성성을 위로하는 남성의 시각이 빚은 결과다. 저항은 커녕 젠더 권력을 가동시킨 작품이다.

(p. 56)


응시는 남성의 권력이다. <더러운 잠>은 이러한 '바라보기'라는 남성 권력을 '여성'대통령을 향해 휘두른 작품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참여라기보다 약자의 정체성을 끌어와 수치심으로 유발케 하려는 태도이며, 이러한 수치심 유발을 저항으로 착각한 결과다. 블랙리스트와 이에 대항하며 마련된 전시에서 선보인 <더러운 잠>은 제도적 억압과 문화적 저항 사이에서 볼모가 되는 '여성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게다가 정치적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이 작품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걸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의 정치적 입장이 작품의 미학적 입장을 변호하거나 보장하진 않는다.

(p. 59)


<더러운 잠>은 형식적으로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와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1863)에서 기본구조를 가져와 박근혜 얼굴을 합성한 '풍자'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풍자'했다는 <더러운 잠>은 원본인 <올랭피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벌거벗은 여성의 몸이 필요했을 뿐 성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 행동은 권력을 향한 풍자가 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결국 남성의 시각에 머물러서 어설프게 '풍자'한 결과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조롱과 혐오로 밖에 소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정치적 입장이 작품의 판단 기준과는 전혀 관계없음을 보여줬다.


한편, 이시기를 지나오며 정치적으로정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었다. 바로 <나꼼수> 신드롬이었다.

당시 이름도 생소했던 '팟캐스트'라는 오디오 방송 플랫폼을 통해 4명의 인물이 모여 정치수다 방송인 <나는 꼼수다>를 시작했다. 이 시절에는 기성언론의 색깔이 비슷해지고 있었던 와중에 당시 정부의 잘못을 기존의 언론문법이 아닌 날것의 느낌으로 파해치는 이 정치 오디오방송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했다. 나꼼수 현상으로 불릴만큼 그 방송의 힘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대안언론으로써 영향력이 커지고 있던 무렵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일명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다.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의 응원을 위한 여성 지지자들의 비키니 응원사진을 둘러싼 <나꼼수>구성원들의 태도는 많은 여성들에게 비판받았지만 끝내 사과는 없었다.


그렇게 성적으로만 여성을 소비하다가 이를 지적하면 도리어 '성적으로만 머물리 말라'고 충고한다. 기만적인 태도이며, 묵살 행위인 셈이다. 말을 듣지 않음, 들을 의사가 없음, 상대의 말을 눌러서 없애버림. 이렇게 여성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면서 뚝심 있고 '남자답게'밀어붙인다. 이렇게 물러서지 않으며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오히려 지지자들에게 더욱 신뢰를 준다. 소위 '리버럴'들이 말하는 대로 '60년대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여성도 성적으로 쟈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여성이 '자유롭게 대상화'가 되어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약자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사회의 권력구도를 모른 척한채 '쿨'하게 자유를 말하는 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자유라고 착각하는 '권력에 의한 대상화'를 여성에게 권장한다.

(p. 86)


쿨함, 재미와 풍자를 추구했던 <나꼼수> 구성원들은 젠더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들의 강한 마초성때문에 진보계열의 지지자들에게 젠더에 있어서 왜곡된 관점만 전달해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꼼수'류'라고도 부를 수 있는 어떤 흐름이 이 사회에 끼친 해로운 영향이 크다. 박정희-박근혜로 상징되는 독재와 이명박이 상징하는 성공 지상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오직 정권 교체에만 '올인'하는 이상한 정의를 정당화한다. 이들은 정권 비판을 위한 도구로만 여성의 목소리를 활용한다. 이들의 관심은 권력의 이동이지 진보가 아니다.

(p. 92~93)


거침없음, 보수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날것의 언어로 지지자들에게 쫄지말라며 정치에 있어서 재미와 조롱을 선사한 그들은 정권교체에 열망이 있었을 망정 정치의 진보를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을까?


2010년대 중반을 거치며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 속에서 생겨난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는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이슈중 하나로 남을 만큼 온라인 상에서 여성의 언어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겪는 이런 움직임에 한국사회는 당황하며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리고 사회전반에서 대대적으로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메갈리아'가 왜 만들어졌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증발한 채 '메갈리아를 옹호하는가'라는 검증만 난무했다.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그렇게 새로운 형태의 '종북 빨갱이'가 된다. '메갈리아'라는 가상의 적은 '한국 남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한국 남자'들의 일상화된 혐오가 마치 '메갈리아'때문에 새롭게 탄생한양, 그들의 혐오를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 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p. 149~150)


이러한 움직임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분석과 이해보다는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단어인 '빨갱이'처럼 너도나도 완장차고 낙인 찍기에 바빴다. 오히려 '메갈리아'가 남성들에게 만연한 '여혐'의 태도를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낙인을 찍어버리기에는 이 현상자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고 생각이 든다.


블랙리스트 사건,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 마녀사냥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여러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의 '개인 되기'를 방해하기에 비판적 의식을 통제하는 제도적 억압을 가하고, 상대적으로 진보 진영은 이 억압을 향해 저항하는 과정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와 멸시를 정당화 한다.

(p. 169)


일련의 사건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보수정권이 시민들에게 제도적 억압을 가한다면 진보 진영도 이 억압을 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약자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버젓이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지함은 벌레가 되고, 취향은 혐오와 반지성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인종, 성, 세대, 지역, 계층, 종교 등의 이유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약자라서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 어려운 경우를 위해, 취향이 정치적 검열 대상이 되거나 인격적 모독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표현의 자유'나 '개인의 취향'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취향, 자유, 표현이라는 개념을 오히려 소수자와 약자를 억압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재확인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p. 175)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 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p. 196)


세계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반지성주의 속에서 한국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언제부턴가 진지함은 외면받는 사회를 살고 있다. 엄숙주의보다 재미, 풍자, 쿨함을 추구하는것. 다 좋지만 이것들을 행할 때 약자와 소수자를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가볍고 재미있을 수는 있으되, 그 시선만큼은 약자와 소수자를 존중하는 선에서 행해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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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7-13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블랙겟타님^^
전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책이에요. 사람에든 행동이든 ‘충‘을 붙이는 게 어디에서부터 유행했는지 모르겠네요. ㅠㅠ

진보적인 남자들의 젠더 의식에 허점이 많은 건 사실이죠. 본인들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여성에겐 국가가 없듯이, 여성에겐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도 없는 것 같아요.

근데 또 망설이게 되는 것은, 그렇다고 진보 세력의 남자들을 다 두고 갈 것이냐.... 거기에 고민이 있는 것 같아요. 역할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역사적 상황이라는 게 있고, 역사적 환경에서 기회라는 게 있잖아요.
니들도 똑같아, 하면서 그래도 좀 나은 애들이랑도 열나게 싸우는 게 나은 방법인지, 걔 중 그래도 말 좀 통하는 애들을 달래는게 나을지... 에궁...
그래도 아침부터 블랙겟타님 글 읽고 나니 기분이가 좋네요. 편안한 주말 되시어요.

근데 진짜 부산이세요? ^^

블랙겟타 2019-07-13 17:4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
음.. 개인적으로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무슨말인가하면 남성들 중에도 페미니즘에 극구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건한 스탠스를 취하는 층을 이해시킬 수 있는 ‘회색지대’라고 해야할까요..그런 것들을 마련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서로 간에 이해할 수 있는 조그마한 접점부터 시작해서 점차 늘려가는..

물론 이 작업만 하는 것은 아니고 더 강한 목소리를 내시는 분도 계시는 것도 맞고.. 여러갈래로..
사실 말이야 쉽지 실제로는 얼마나 험난한 과정인지도 알고 있지만요..ㅜㅜ
지금하고 있는 여성주의 책들을 읽으면서 좀더 생각을 발전 해보려구요. (˶′◡‵˶)

네 단발머리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그리고 네!! 지금 여기는 바닷 바람이 불고 있는걸요? ㅎㅎㅎ(● ˃̶̀ロ˂̶́)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