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대학생 때였지 싶다. 실연 당해 질질 짜고 있던 나를 향해 아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들은 왜 그렇게 사랑에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고. 사랑 따위 별거 아니라고.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데 여자들은 사랑을 너무 큰 것으로 생각한다고. 실연당해 우는 딸을 위로하겠다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치고는 표현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그때까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주변의 많은 여자친구들이 사랑에 굉장한 중점을 두고 있었다. 대화의 화제는 주로 애인과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수렴하기 일쑤였으며,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성애적) 사랑이었다. 행복의 절대 조건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것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남성들 역시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강한 집착을 보이고는 했지만, 여성들과는 바라보는 관점이랄까, 삶의 철학 자체가 꽤나 차이가 났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어 연애는 삶에서 20% 정도의 비중에 불과한 반면에, 여성들에게는 70% 이상 차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왜 여자들과 남자들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나 철학이 차이가 날까? 아빠의 말을 들으면 마치 여자들에게 타고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럴까? 정말로 유전자의 차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사랑에 더 집착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적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거쳐 정착에 적합하게 설계되어 있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다 헛소리라 생각한다.

성별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 여성과 남성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것이다. 남자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를 살펴보면 대부분 모험, 대결,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수렴한다. 헬로카봇의 주인공 차탄은 가족들과 주변인들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영웅처럼 기지를 발휘해 온갖 일을 해결한다. 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악당을 물리치고 시공간을 이동한다. 팽이로 대결하는 베이블레이드의 주인공들은 오로지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반면에 여자아이들이 가장 많이 보는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콩순이, 콩순이의 세계는 좋은 말로 하면 아기자기하고 나쁜 말로 하면 협소하다. 콩순이는 엄마가 외출한 동안 동생을 돌보아주고 동생과 엄마의 화장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도 하며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나 새 옷을 입은 장면을 보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철없고 서툰 아빠를 놀리며 웃기도 한다.

한 때 아이를 키우는 모든 가정의 구원자라고 여겨졌던 뽀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뽀로로에서도 남자 캐릭터로 비치는 뽀로로와 크롱은 늘 모험을 하거나 말썽을 부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여자 캐릭터인 루피는 케이크와 빵을 굽고 주변 친구들을 돌보고 때로는 잔소리하는 엄마처럼 야단을 친다. 패티라는 새로운 친구가 왔을 때는 질투하는 모습도 보인다.

나를 포함하여 내 또래의 여성들은 대개 어린 시절 공주 이야기를 보며 성장했다. 사악한 계모의 괴롭힘에 시달리면서도 어느 날 반드시 나만의 왕자님이 나타날 것이라 노래를 부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공주를 보면서, 괴물에게 끌려간 공주를 언젠가 반드시 왕자가 나타나 구원한 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 수많은 이야기를 보면서 성장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무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생각해본다. 사랑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믿게끔 하는데 정말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된 뒤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성들이 <대부> 같은 영화를 보며 마피아 수장의 카리스마에 감탄하고, 순진한 청년이 냉혹한 마피아로 탈바꿈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고, 그러면서 적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삶과 죽음에 고뇌하는 사이,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을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왕자님’이 등장하기를 꿈꾸었던 것 같다.

누가 남성들은 <대부> 보고 여성들은 <귀여운 여인> 보라고 정해둔 적 있나? 각자 취향에 맞추어 자기가 좋아하는 것 보았을 뿐인데, 사용자들이 그런 컨텐츠를 원하니 만들었을 뿐인데 어쩔 것이야! 하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과연 그 컨텐츠에 암묵적인 사회의 압력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두 가지 영화를 보면서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캐릭터의 성별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에 와서 나는 그런 점이 궁금해진다.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는 이와 같이 각종 컨텐츠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성역할을 극복하려 애쓰고, 그런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 안에도 여성 혐오가 있음을 인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에세이다.

‘울프소셜클럽’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저자는 본래 잘 나가던 고액 연봉의 카피라이터로 직업적으로도 잘 나가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고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들처럼 화려한 연애를 하는 문자 그대로의 ‘골드미스’였다. 그러나 그랬던 그녀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여성이라는 성별로 넘어설 수 없는 단단한 벽과 성별에 따른 엄청난 격차를 인지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그녀는 한때 ‘바이블’처럼 숭배했던 섹스 앤 더 시티가 사실상 여성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컨텐츠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는 얼핏 여성들 역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전문직으로 잘 나갈 수 있으며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을 위해 거침없이 투자하는 듯 그려두었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남성에게 목메고 잠시도 남성 없이 생활하지 못하는 컨텐츠에 다름 아니라고. 시청자들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그들의 캐릭터를 내면화하며 실상 각자의 야망과 재능이 무엇이건 간에 연애와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슈라 여기게 된다고.

한 때의 열렬한 애청자로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도 여성들 간의 연대,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 관련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데 굉장히 힘 있고도 명쾌한 시각이 인상적이었고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한편으로 평소 나의 생각보다는 조금 더 급진적인 측면도 있어 모든 면을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예를 들어 외모 권력은 여성에게만 적용되고 남성에게는 예외라는 주장이라든가 (남성에게 더욱 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이라고 모두가 자유롭지는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는 부분들. 전반적으로 ‘고학력’, ‘고연봉’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주제가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담론 자체가 중산층 엘리트 여성을 위한 것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다소 아쉬웠고, 그러나 이는 책의 볼륨이나 저자의 배경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따로 있으므로 부족한 부분은 또 다른 목소리를 통해 들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 본 기사에서, 최근의 여성들은 명품 가방과 꾸밈비용에 지출을 대폭 줄이고 자동차와 부동산 같은 실질적 재산에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나오던데, 이 책을 읽었던 것이 떠오르며 여러모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환상과 남성에게 욕망당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이후 어디로 도달할지 많이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부커 수상작인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국-미얀마 사이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노역하던 전쟁포로들의 삶을 다룬다. 소설 속에서 지배자는 동양인인 일본인, 피지배자는 서양인이라는 점이 기존의 많은 전쟁 서사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은 소설 속에 한국인 캐릭터도 등장한다는 것인데, 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에 한국인이 등장한다니! 하고 국뽕에 심취하기는 아직 이르다.

전쟁 포로의 삶이 참혹한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하사 고아나는 유난히 악명이 높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고아나는 포로들을 거침없이 구타하고 고문한다. 그런 고아나는 훗날 전쟁이 끝나자 상관들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쓴 채 전범재판의 법정에 서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본명이 밝혀진다. 그의 진짜 이름은 최상민, 즉 악독하기 그지없었던 일본인 하사의 정체가 다름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차출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정작 위에서 명령을 내렸던 상급 장교들이 죄다 일본으로 돌아가 멀쩡하게 살아가는 동안, 최상민은 그렇게 교수형에 처해진다.

최상민에 관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렸다. 영화 박하사탕은 주인공 영호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갖 폭력과 기행을 일삼는 영호의 행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관객은, 그가 젊은 시절 군생활을 하던 당시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고, 그곳에서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신이 점차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수했던 청년이 트라우마로 인해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형사가 되고, 결국은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삶.

여기에서 질문. 플래너건의 소설 속 최상민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참고로 소설 속에서 최상민에 관한 에피소드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가 일본 군대에 강제로 차출되었는지, 자발적으로 지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발과 강제의 차이가 그들이 구조적으로 피해자였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최상민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 명령을 거부할 방안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있었다고 한들 최상민이 홀로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가 무조건 구조의 피해자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폭력과 고문을 행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므로.

박하사탕의 영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영호 또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5월의 광주로 투입되어 부당한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사람을 죽인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형사로 일하던 당시 피의자들을 고문한 사실과 망나니처럼 살았던 세월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박하사탕>을 보는 괴로움이 여기에서 나온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에서는 불편함이 없다. 선을 칭송하고 악을 처단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최상민과 영호의 사례만 보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독자와 관객은 단순하게 분열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임지현의 <기억 전쟁>은 이와 같이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인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다시피 한 주요한 비극을 둘러싼 담론들을 보면서, 역사란 참으로 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집단이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일례로 홀로코스트의 참담함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할 수도 있다는 것, 수많은 베트남 시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한 이력이 있는 한국인들이 오로지 일본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우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압제했던 일본이 그런 기억은 부정한 채로 원폭의 피해자성만 호소하는 현상 등등을 보다 보면, 저러한 모습이 비단 한 국가의 특징이라든가, 개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집단의 대단히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늘 민족과 집단을 강조한다. 히틀러와 나치가 유난히 사악했던 것이라고, 스탈린이 나쁜 놈이었다고, 일본은 상종 못할 악랄한 민족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선악이 불분명한 세계는 두렵고,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악을 저지른 사람이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기 위해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도록, 외부의 ‘악’이 우리를 망쳤다고 믿도록, 끊임없이 공공의 적을 만들고 집단을 단속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노를 보이지만, 정확히 같은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다는 국내의 ‘기지촌 성매매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놀랍도록 드물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꽃과 같은 우리의 소녀들이 사악한 일본놈들에게 겁탈당한 사건’이라면, 기지촌 성매매 여성 사건은 그저 ‘성매매 여성들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인에게 몸을 팔다가 조금 고생한’ 정도의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피해 사실을 옹호할 경우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이 흐려진다며 격렬히 항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약자들 간에 서로의 피해자성을 둘러싸고 경쟁하다시피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니다. 동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스탈린의 압제의 기억을 분산시킨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현대에 와서, 아주 가깝게는 페이스북 등지에서 노동운동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아픈 기억과 역사는 책에서도 등장하다시피 어느 한쪽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의 기억이 지워지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서로 연대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아픔에 주목하고 강조하기 위해 타자의 아픔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바탕으로 타자의 아픔까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아픈 과거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세상에는 생각보다 분명한 것이 상당히 드물다는 것이다. 선과 악, 흑과 백, 명과 암, 뚜렷하게 나뉘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람은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한 가지 사건에 때로 수백 가지의 맥락이 얽혀있기도 하고, 한 줄로 축약되는 역사는 사람에 따라 수천수만 가지의 서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을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이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정말 훌륭한 책이었다.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꼽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년 전 친정에서 며칠밤을 묵을 때의 일이다. 밤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헉헉대는 짧은 호흡과 무언가 둔탁한 것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뭐지 하면서 봤더니 깜깜한 거실 한복판에서 할머니가 이상한 동작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팔을 공중으로 뻗었다 오므렸다, 다리를 벌렸다가 모았다, 전후 좌우로 허리를 돌리면서.

다음날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가 별거 아니라며 말했다. 운동하시는 거라고. 오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매일 밤 30분도 넘게 운동을 하신다고.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듣고 약간 벙쪘는데, 그렇게 나이 든 노인에게도 생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94살이었던가 그랬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2년쯤 후에 돌아가셨는데, 이후로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20대의 나는 젊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섹스앤더시티라는 드라마에는 주인공 사만사가 음모에 하얀 털이 난 것을 보고 경악한 뒤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에 이런저런 강력한 시술을 받았다가 부작용에 시달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마도 급격히 진행된 노화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 외면을 더욱 가꾸려는 시도였을텐데, 당시에 그걸 보면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대로도 멋지고 아름답고 예쁜데 왜 저러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추접스럽다는 걸 모르나?

그렇다. 그때 당시에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각자 자신의 나이에 맞춰 거기 어울리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이해하지 못했다. 젊음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고, 세월의 흐름에 전전긍긍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소 추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 들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이해할 수 없음’은 나 자신이 ‘노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몰랐고, 또 알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흰머리가 늘어나고, 조금만 방심하면 허리의 선이 둔탁해지고, 간혹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말 그대로 ‘싱싱한’ 젊음들과 나 자신이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20대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고, 더 안정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뭐랄까 나 자신이 어떤 ‘기준점’과 ‘주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체력은 서서히 떨어지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주름살은 늘어나고, 더 이상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듯한’ 그런 기분. 고작 30대에 불과한 내가 이러니, 40대, 50대, 60대들은 아마도 더할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 배제되는 느낌, 낙오되는 느낌.

물론 오늘날의 20대들은 너무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암묵적인 주인공은 20~30대라고 늘 생각해왔다. 소설,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렇고, 어떤 소비층, 주류 문화의 주역은 늘 그 나이 때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실제 해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20대라는 것은 인류 전체에게 있어 ‘젊음’과 ‘절정’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왜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고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부터, 체력이 떨어지고, 외형이 바뀌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인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97세로, 에세이를 집필하는 당시는 물론 마지막 에필로그 단계까지도 살아있었다. 이 에세이가 나온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니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지만. 그는 태생부터 굉장히 정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90대가 되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어떤 ‘활기’가 장수의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도 이러한 ‘활기’는 어떤 강인한 정신이라든가, 육체활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장수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책은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외에도 여러 가지 과학적 통계와 자료를 통해 생물의 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인간의 육체가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야기한다. 호르몬과 유전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면서 진화심리학자들이 기뻐할 만한 내용도 꽤 되고, 그러면서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도 있었는데, 이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이란 측면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 사회화의 과정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생물의 본능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노화의 과정, 다른 생물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죽는지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매우 철학적이고 우아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김명남 번역가의 훌륭한 문장을 통해 저자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지라 소소한 웃음 포인트도 꽤 된다. 곤충이나 동물 등은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죽지 않으려고 저항을 하는데, 그와 같이 생을 이어가는 것, 그리고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같은 선상에서 인간의 젊음에 대한 집착 또한 계속 살겠다는 생에 대한 의지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노화는 곧 죽음이므로.

저자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자의 아버지 역시 몸이 무너지고, 정신도 흐려지는 와중에도 매일 30분씩은 발을 질질 끌면서라도 운동을 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이가 들고 더 오래 살수록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해지기 마련인데, 시간이 흐르고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쇠퇴함에 따라 성욕도, 창작욕도, 사회적인 인정 욕구나 명예욕도 사그라들고, 그러면서 자연히 모든 욕구가 신체를 편안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생존해나가는 그 자체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례를 들며, 97세가 된 아버지의 세계는 몸 안에 갇혀 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신체의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육체가 곧 감옥처럼 작용하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한때 자위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액을 분출하지 않음으로써) 매우 오래 살았다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도시전설처럼 돌아다니곤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게 영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거세를 한 수컷 생물들이 하지 않은 생물보다 오래 살았다는 내용, 번식을 하지 않은 곤충들이 그렇지 않은 곤충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번식을 하고, 성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생명을 조금씩 갉아서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장수의 조건 중 하나가 규칙적인 성생활이라는 데서 다소 모순되기도 하지만)

엊그제 우연히 ‘비동의 간음죄’ 관련해서 어떤 남성분이 저 법안이 통과되면 어디 여성들이랑 성관계 무서워서 하겠느냐고, 그냥 불알을 잘라내고 고자로 사는 게 낫겠다고 일갈하는 댓글을 보았는데, 그분에게 장수의 욕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장수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자르세요, 그냥. 자르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소설 수업 시간에는 정용준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 다 읽고 돌아가면서 합평이랄까, 소감을 말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수강생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역시, 남성작가의 작품이라 그런지 뭔가 굵직굵직하고, 이야기도 힘이 있고, 그래서 마음에 들어요. 여성작가들하고 다르게. 여성작가들은 너무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작은 이야기만 다루고 그러잖아요. 전 여성작가보다는 남성작가가 잘 맞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 얼굴은 트럼프를 바라보는 툰베리처럼 구겨졌는데, 아마 맨 뒷자리에 앉아서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네가 지금 말한 것은 개소리야!라는 것을 정말 정말 표현하고 싶었건만... 안타까울 따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아니 저 말이 왜요? 하고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겠으나, 일단은 수강생 대부분이 여성이고, 말하는 본인도 여성이고, 강사도 여성인 상황에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실례인 동시에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물론 의견 자체도 동의할 수 없었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말하곤 한다. 여성작가는 어쩌고 저쩌고, 남성작가는 어쩌고 저쩌고. 여성작가들은 너무 섬세해, 예민해, 징징거려, 소심해, 내면세계에만 집중해, 개인적이고 작은 문제만을 다뤄, 사랑타령만 해, 기타 등등. 그러면서 여성들도 남성들처럼 넓고 다양한 작품을 다루었으면 좋겠다는 건설적인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듣다 보면 궁금해진다. 실제로 여성작가들이 저런가? 저것이 여성작가의 특징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대프니 듀 모리에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보고 여성적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유정을 보고 징징댄다거나 소심하다고 말하는 사람 역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가들은 ‘여성’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여성작가의 작품 중에도 스테레오 타입에 부합하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다루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경우 여성적이라는 딱지가 붙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모든 공포소설의 원형으로 꼽을 수 있을만한 작품인데,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너무너무 여성스러운 소설!이라고 말하는 사람 또한 없다. 이를 두고 메리 셸리에 대해 “역시 여성작가라서 위대해!”라고 성별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위대한 작품을 쓴 여성작가들은 작품 앞에서 성별이 소거된다.

어째서일까? 이는 아마도 인간의 기본 모델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동시에, 남성이 가진 요소는 긍정적인 면으로 치부되고, 여성이 가진 요소는 부정적인 것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과 일정 부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넓고 확장된 세계를 다루는 것, 인간의 본성 같은 심오한 문제를 다루는 것, 기발하고 창의적이며 재미있는 것, 모두 남성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이 이런 문제를 다룰 경우 “여성 작가 같지가 않네.” 혹은 “여성 작가인 줄 몰랐어요.”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여성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탈여성’이 되는 것이다. 섬세한 내면의 문제와 같이 전형적인 ‘여성의 문제’로 치부되는 것들을 다루는 경우에만 비로소 다시 “여성스럽다”는 칭찬과 비판이 가해진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여성 작가들로서는 작품 활동을 하며 훨씬 강한 장벽을 만나게 된다. 사랑이야기와 개인의 내면, 일상생활 등의 소재를 남성 작가가 다룰 때는 “남성이 섬세하기까지 하다”며 칭찬을 듣지만, 여성이 그런 글을 쓰면 전형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성별을 숨기거나 중성적인 가명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놀랍지 않은 이유이다.

어슐러 르 귄의 <밤의 언어>에는 이와 같이 작가의 성별에 따라오는 고정관념을 깊게 다룬 이야기가 실려있다. 그 이야기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작가가 쓴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라는 책의 머리말로서, 르 귄은 서두에서부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의 깊고 돈독한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임스의 정체는 사실 앨리스라는 것을 밝힌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오랫동안 남성의 가명을 쓰고, 당연히 남성인 줄 알았던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작가가 실은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의 소회를 밝힌 글이다.

앨리스 셀던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상당히 인기를 얻었는데, 인기를 얻음에 따라 그의 글쓰기 방식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남성답지 않게 섬세한 면’이 돋보인다면서 실은 팁트리의 정체가 여성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남성이 쓸 수 없고 헤밍웨이의 소설을 여성이 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글에서는 “피할 수 없는 남성적인 요소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팁트리는 여성을 이해하는 척 하지만 남성이기에 본질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잘못된 글쓰기라는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 물론 팁트리의 정체가 공개되면서 이러한 모든 추측은 한낱 오류일 뿐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사실 여성작가와 남성 작가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비단 남성들이나 성차별주의자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같은 여성 중에서도 여성작가의 작품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고, 실제로 굉장히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쓰고, 성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글임에도 작가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것만으로 부당한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과 어떤 기대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문학이나 글쓰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밤의 언어>는 이처럼 문체, 젠더, 장르 등에 관한 사유가 담겨있는 에세이집이다. 앞선 내용은 책이 다루는 많은 주제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한 꼭지를 가져와서 적은 것이지만, 이외에도 문학, SF, 판타지, 여성적 문체 등 일반적으로 비하되거나 폄하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논리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이 담겨 있다.

르 귄의 다른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 또한 결코 읽기 쉽지 않다. 문장마다 배어있는 은유와 몇 겹씩 들어가는 사고는 몇 번씩이고 되새김질하며 읽어야 하기에 작고 얇아 보이지만 읽는데 상당한 공이 든다.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란 부제를 달고 있는 만큼 주로 장르소설과 르 귄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특화된 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읽다 보면 결국 글쓰기와 장르를 뛰어넘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을들의 당나귀 귀 1
손희정 외 지음, 한국여성노동자회 외 기획 / 후마니타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본래 ‘멍청했던’ 주인공 연홍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한다. 연홍은 끝없이 되뇐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여성들은 성차별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동시에,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