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부커 수상작인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태국-미얀마 사이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노역하던 전쟁포로들의 삶을 다룬다. 소설 속에서 지배자는 동양인인 일본인, 피지배자는 서양인이라는 점이 기존의 많은 전쟁 서사들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특이점은 소설 속에 한국인 캐릭터도 등장한다는 것인데, 우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에 한국인이 등장한다니! 하고 국뽕에 심취하기는 아직 이르다.

전쟁 포로의 삶이 참혹한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하사 고아나는 유난히 악명이 높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고아나는 포로들을 거침없이 구타하고 고문한다. 그런 고아나는 훗날 전쟁이 끝나자 상관들의 죄까지 모두 뒤집어쓴 채 전범재판의 법정에 서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본명이 밝혀진다. 그의 진짜 이름은 최상민, 즉 악독하기 그지없었던 일본인 하사의 정체가 다름 아닌 식민지 조선에서 차출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정작 위에서 명령을 내렸던 상급 장교들이 죄다 일본으로 돌아가 멀쩡하게 살아가는 동안, 최상민은 그렇게 교수형에 처해진다.

최상민에 관한 대목을 읽으면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렸다. 영화 박하사탕은 주인공 영호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시간을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온갖 폭력과 기행을 일삼는 영호의 행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관객은, 그가 젊은 시절 군생활을 하던 당시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고, 그곳에서 명령을 수행하던 중에 사람을 죽이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신이 점차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수했던 청년이 트라우마로 인해 악독한 고문을 일삼는 형사가 되고, 결국은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삶.

여기에서 질문. 플래너건의 소설 속 최상민은 피해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참고로 소설 속에서 최상민에 관한 에피소드는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가 일본 군대에 강제로 차출되었는지, 자발적으로 지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자발과 강제의 차이가 그들이 구조적으로 피해자였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최상민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는지, 명령을 거부할 방안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있었다고 한들 최상민이 홀로 교수형에 처해진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가 무조건 구조의 피해자라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포로들을 대상으로 폭력과 고문을 행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으므로.

박하사탕의 영호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호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영호 또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5월의 광주로 투입되어 부당한 명령을 받고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그가 사람을 죽인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형사로 일하던 당시 피의자들을 고문한 사실과 망나니처럼 살았던 세월 또한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호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과 <박하사탕>을 보는 괴로움이 여기에서 나온다.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에서는 불편함이 없다. 선을 칭송하고 악을 처단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최상민과 영호의 사례만 보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므로 독자와 관객은 단순하게 분열되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갈등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임지현의 <기억 전쟁>은 이와 같이 피해와 가해의 경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상황에 따라 같은 사건을 두고도 얼마나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인류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류의 트라우마가 되다시피 한 주요한 비극을 둘러싼 담론들을 보면서, 역사란 참으로 반복을 거듭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집단이란 얼마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인지를 실감했다.

일례로 홀로코스트의 참담함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아주 무자비할 수도 있다는 것, 수많은 베트남 시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한 이력이 있는 한국인들이 오로지 일본에 대해서만 핏대를 세우고 비판하고 있다는 것,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를 압제했던 일본이 그런 기억은 부정한 채로 원폭의 피해자성만 호소하는 현상 등등을 보다 보면, 저러한 모습이 비단 한 국가의 특징이라든가, 개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집단의 대단히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늘 민족과 집단을 강조한다. 히틀러와 나치가 유난히 사악했던 것이라고, 스탈린이 나쁜 놈이었다고, 일본은 상종 못할 악랄한 민족이라고 말이다.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선악이 불분명한 세계는 두렵고, 무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엄청난 악을 저지른 사람이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인간의 인지 시스템은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기 위해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도록, 외부의 ‘악’이 우리를 망쳤다고 믿도록, 끊임없이 공공의 적을 만들고 집단을 단속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만 하더라도 그렇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노를 보이지만, 정확히 같은 시스템으로 전개되었다는 국내의 ‘기지촌 성매매 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는 놀랍도록 드물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꽃과 같은 우리의 소녀들이 사악한 일본놈들에게 겁탈당한 사건’이라면, 기지촌 성매매 여성 사건은 그저 ‘성매매 여성들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인에게 몸을 팔다가 조금 고생한’ 정도의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피해 사실을 옹호할 경우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담론이 흐려진다며 격렬히 항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약자들 간에 서로의 피해자성을 둘러싸고 경쟁하다시피 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니다. 동유럽에서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스탈린의 압제의 기억을 분산시킨다고 항의하는 목소리도 높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현대에 와서, 아주 가깝게는 페이스북 등지에서 노동운동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여성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아픈 기억과 역사는 책에서도 등장하다시피 어느 한쪽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의 기억이 지워지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서로 연대가 필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아픔에 주목하고 강조하기 위해 타자의 아픔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바탕으로 타자의 아픔까지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가 이루어지고, 아픈 과거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이 책을 꿰뚫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고.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세상에는 생각보다 분명한 것이 상당히 드물다는 것이다. 선과 악, 흑과 백, 명과 암, 뚜렷하게 나뉘는 것이 거의 없다. 사람은 단순하면서 복잡하다. 한 가지 사건에 때로 수백 가지의 맥락이 얽혀있기도 하고, 한 줄로 축약되는 역사는 사람에 따라 수천수만 가지의 서사를 갖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을 읽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이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 정말 훌륭한 책이었다.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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