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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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친정에서 며칠밤을 묵을 때의 일이다. 밤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헉헉대는 짧은 호흡과 무언가 둔탁한 것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뭐지 하면서 봤더니 깜깜한 거실 한복판에서 할머니가 이상한 동작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앉았다 일어섰다, 팔을 공중으로 뻗었다 오므렸다, 다리를 벌렸다가 모았다, 전후 좌우로 허리를 돌리면서.

다음날 엄마에게 이야기하자 엄마가 별거 아니라며 말했다. 운동하시는 거라고. 오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매일 밤 30분도 넘게 운동을 하신다고. 당시에 그 이야기를 듣고 약간 벙쪘는데, 그렇게 나이 든 노인에게도 생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때 할머니의 연세가 94살이었던가 그랬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2년쯤 후에 돌아가셨는데, 이후로도 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그때의 모습이 떠오른다.

20대의 나는 젊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섹스앤더시티라는 드라마에는 주인공 사만사가 음모에 하얀 털이 난 것을 보고 경악한 뒤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에 이런저런 강력한 시술을 받았다가 부작용에 시달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마도 급격히 진행된 노화를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 외면을 더욱 가꾸려는 시도였을텐데, 당시에 그걸 보면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대로도 멋지고 아름답고 예쁜데 왜 저러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추접스럽다는 걸 모르나?

그렇다. 그때 당시에는 젊은이든 늙은이든 각자 자신의 나이에 맞춰 거기 어울리게 살아가면 되는 것을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이해하지 못했다. 젊음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고, 세월의 흐름에 전전긍긍하는 이들의 마음을 다소 추접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이 들어서 저러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모든 ‘이해할 수 없음’은 나 자신이 ‘노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몰랐고, 또 알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흰머리가 늘어나고, 조금만 방심하면 허리의 선이 둔탁해지고, 간혹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말 그대로 ‘싱싱한’ 젊음들과 나 자신이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마다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물론 20대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고, 더 안정적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뭐랄까 나 자신이 어떤 ‘기준점’과 ‘주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체력은 서서히 떨어지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주름살은 늘어나고, 더 이상 ‘인생에서 주인공이 아닌 듯한’ 그런 기분. 고작 30대에 불과한 내가 이러니, 40대, 50대, 60대들은 아마도 더할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는 느낌, 배제되는 느낌, 낙오되는 느낌.

물론 오늘날의 20대들은 너무나 힘든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암묵적인 주인공은 20~30대라고 늘 생각해왔다. 소설,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렇고, 어떤 소비층, 주류 문화의 주역은 늘 그 나이 때의 사람들이었다. 이때 실제 해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20대라는 것은 인류 전체에게 있어 ‘젊음’과 ‘절정’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왜 그것에 그토록 집착하고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그 자리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부터, 체력이 떨어지고, 외형이 바뀌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인 데이비드 실즈의 아버지는 97세로, 에세이를 집필하는 당시는 물론 마지막 에필로그 단계까지도 살아있었다. 이 에세이가 나온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니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지만. 그는 태생부터 굉장히 정력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90대가 되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고 여자 친구를 사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어떤 ‘활기’가 장수의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도 이러한 ‘활기’는 어떤 강인한 정신이라든가, 육체활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장수에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책은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외에도 여러 가지 과학적 통계와 자료를 통해 생물의 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지, 인간의 육체가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이야기한다. 호르몬과 유전자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하면서 진화심리학자들이 기뻐할 만한 내용도 꽤 되고, 그러면서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대목도 있었는데, 이는 인간 역시 동물의 일종이란 측면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도 같다. 사회화의 과정은 배제하고 철저하게 생물의 본능적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발생하는 여러 가지 노화의 과정, 다른 생물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는지, 우리는 왜 태어났고 왜 죽는지에 관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매우 철학적이고 우아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김명남 번역가의 훌륭한 문장을 통해 저자의 유머감각이 돋보이는지라 소소한 웃음 포인트도 꽤 된다. 곤충이나 동물 등은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죽지 않으려고 저항을 하는데, 그와 같이 생을 이어가는 것, 그리고 유전자를 남기고자 하는 것은 생물로서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같은 선상에서 인간의 젊음에 대한 집착 또한 계속 살겠다는 생에 대한 의지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노화는 곧 죽음이므로.

저자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저자의 아버지 역시 몸이 무너지고, 정신도 흐려지는 와중에도 매일 30분씩은 발을 질질 끌면서라도 운동을 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이가 들고 더 오래 살수록 생에 대한 집착은 강해지기 마련인데, 시간이 흐르고 신체와 정신의 기능이 쇠퇴함에 따라 성욕도, 창작욕도, 사회적인 인정 욕구나 명예욕도 사그라들고, 그러면서 자연히 모든 욕구가 신체를 편안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생존해나가는 그 자체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도 같다. 저자는 아버지의 사례를 들며, 97세가 된 아버지의 세계는 몸 안에 갇혀 버린 것 같다고 말한다. 신체의 기능이 너무 떨어져서 육체가 곧 감옥처럼 작용하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인상깊었던 대목 하나.

한때 자위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액을 분출하지 않음으로써) 매우 오래 살았다는 스님들의 이야기가 도시전설처럼 돌아다니곤 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게 영 터무니없는 말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는 거세를 한 수컷 생물들이 하지 않은 생물보다 오래 살았다는 내용, 번식을 하지 않은 곤충들이 그렇지 않은 곤충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번식을 하고, 성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생명을 조금씩 갉아서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장수의 조건 중 하나가 규칙적인 성생활이라는 데서 다소 모순되기도 하지만)

엊그제 우연히 ‘비동의 간음죄’ 관련해서 어떤 남성분이 저 법안이 통과되면 어디 여성들이랑 성관계 무서워서 하겠느냐고, 그냥 불알을 잘라내고 고자로 사는 게 낫겠다고 일갈하는 댓글을 보았는데, 그분에게 장수의 욕망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농담이 아니라 장수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자르세요, 그냥. 자르면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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