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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라이크 미 - 흑인이 된 백인 이야기
존 하워드 그리핀 지음, 하윤숙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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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의 신발을 신어보겠다'라는 말, 즉 '내가 너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겠다'라는 건 충분히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상상일 수 있으니깐요. 하지만!!! '너의 입장이 되어 살아보겠다'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생각해본다'라는 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의 희생도 요구하지 않습니다만, '살아보겠다'라는 건 나의 삶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류의 시도는 이미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통해 보았었기도, 또 '성경대로 살아본 일년'이란 TED 동영상을 통해서도 볼 수 있었었기에 그리 낯선 시도는 아니겠습니다만, 이런 시도가 1959년의 미국에서, 그것도 당시 가장 뜨거운 이슈였었던 흑백 인종간의 문제에 관해 이루어졌다는 건 이와 유사한 그 어떤 시도들이 가지지 못한,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요. 이 책 「블랙 라이크 미 Black like me」는 1959년 말, 인종문제 전문가이자 백인인 저자 존 그리핀이 (피부색소 변화치료 등의 의학적 도움을 받아) 직접 흑인이 되어 당시 흑백차별에 가장 심했던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주에서 약 7주간 생활했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모든 의문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흑인이 억압당하는 땅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려 했다. …… 흑인 .남부. 이런 것은 세부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되는)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 또한 이 이야기는 박해받고, 빼앗기고, 미움 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일 수도 있고, 미국 내 흩어져 사는 멕시코 사람일 수도 있으며, 그 어떤 '열등한' 집단에 속한 어느 누구일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만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다. 

- 저자가 쓴 <머리말>중 

저자가 흑인이 되어 경험했던 현실적 차별들은 2013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충분히 넘어서는 것들이었습니다. 흑인은 고급 레스토랑 앞의 메뉴판조차도 읽어서는 안되며, 아무 화장실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백인 여성 심지어는 백인 여성의 모습이 있는 영화의 포스터까지도 보아서는 안되며, 시내버스 기사는 흑인인 그가 하차벨을 여러 번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여덟 블럭이나 더 가서, 그것도 백인 손님이 내릴때에야 그가 버스에서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기도, 미시시피로 가는 고속버스는 10분간의 정차 중에 백인 승객들에게는 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흑인들에게는 하차를 할 수 없도록 막아서는 등 과연 이러한 일들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실제 있었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군요.

 

"모빌에서의 보냈던 3일간. …… 이번에도 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모든 백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것, 예를 들어 식사할 만한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화장실, 손 씻을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정작 저를 더 놀라게 해주었던 것은 이러한 현실적 차별이 아니라, 백인들 마음 속에 그들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 못할만큼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흑인에 대한 증오와 잘못된 편견,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는 흑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자기비하였었었지요. 이에 관해 그리핀은 라이오넬 트릴링이 말한 '학습된 행동 양태가 너무 깊어 몸에 배어 무심결에 반응이 나오는 것을 문화라고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흑인인 자신 앞에서 백인들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모습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습니다.

      

"겉치레일망정 흑인에게는 자존감이나 인격 같은 것도 보일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 백인은 자기 본성의 가장 품위없는 측면을 이렇게 내보이면서 어떻게 자기가 원래부터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잇는지 흑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 지금 내가 차 안에서 보는 모습은 자기 자신에게도, 함께하는 상대에게도 아무런 존중의식을 보이지 않는 그런 식의 모습이었다." 

"그들(백인들)은 흑인이 도덕성이 몹시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짓을 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흑인을 기계처럼 대하는 사람에 비하면 덜 불쾌한 편이다. 흑인은 인간 존재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핀은 자신이 만났던 흑인들의 말을 통해 1959년 당시 미국 백인들이 가지고 있던 흑인에 대한 편견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흑인은 머리가 나쁘며 선천적으로 폭력적이고,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는 등등의 편견이 실제 흑인이 그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백인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는 「노동의 배신」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청결하지 못하고 병에 자주 걸리는 것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인 것이지 결코 그들이 청결하고 건강할 수 있음에도 그러한 생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거지요.

 

 

● 흑인은 교육 수준이 낮아요. 자녀는 교육시킬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흑인은 교육을 받아도 백인과 같은 직업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가정생활이니 고상한 생활수준이니 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 저들은 우리가 돈을 벌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결국 수입이 없어서 세금을 많이 낼 수도 없게 하지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거의 모든 세금을 내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악순환이지요. ……  저들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밀어놓고는 우리가 저 아래 뒤처져 있는 게 우리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요. …… 흑인의 경우에는 뭔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일과 공부 저 너머에 더 나은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지 못해요.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태어났어요. 이건 흑인이든 백인이든 다른 어느 인종이든 똑같지요. 자라면서 이 빈손이 채워지는 거예요. 빈민가에서 더럽고 가난한 삶을 보면서 자란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의 빈손은 매우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요.

- (흑인)그리핀이 만난 흑인들의 말 중

 

● 흑인은 이등 시민조차도 되지 못한 채 거의 10등 시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흑인의 하루 일상은 온통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계속 확인받는 일로 이뤄져 있다. 더 나은 직장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계속 거절당할 때, …… 주변에 화장실이나 음식점이 있는데도 흑인용으로 지정된 곳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할 때, 이런 일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신경이 전혀 무뎌지지 않는다. 아픔을 일깨우는 새로운 상황이 쓰린 상처 위에 또 다시 상처를 입히고,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간다. …… 흑인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받는 길은 이 모든 일이 자기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종, 자기 피부 속에 들어 있는 색소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오래전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이다. 어머니, 이모,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세심한 손길로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고, 비록 흑인일 때는 그럴 수 없지만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 (백인)그리핀의 독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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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후반부에는 이 책이 출간된 이후의 변화된 상황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미국 사회에도 조금씩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고, 흑인들 또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하게 되지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침해하는 모든 법률과 제도, 관습에 저항하는 비폭력운동을 통해 '흑백인의 평등과 통합'을 주장하며 다수의 지지를 받았습니다만, 이와는 다르게 '흑백의 분리'를 통해 인종 문제를 해결하려는 말콤 X를 중심으로 한 세력도 등장했었었지요.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었을 당시 제가 가지게 되었던 생각은 통합이 아닌 분리가 더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저자 존 그리핀 또한 책의 몇 곳에서 (말콤 X의 주장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리'가 더 적절한 해법이다라 읽힐 수 있는 의견을 내놓고 있지요. 

 

 

● 통합된 사회라는 오래된 꿈을 버린 흑인 사상가는 체제 속에 배어 있는 약점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이 약점 중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이른바 '분열된 개성'이었다. …… 분열된 개성이란 이 사회에서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흑인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흑인은 성공하기 위해 백인을 모방해야 했다.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아, 흑인 존재, 흑인 문화를 수치스러운 것처럼 숨기고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성공을 이룬 사람은 소외된 주변인이 되었다. 흑인 문화의 장점으로부터도, 동료 흑인으로부터도 소외되었고, 그의 얼굴에 드러난 색소 때문에 백인으로부터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취급을 당하고 결코 가짜 백인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궁극적으로 (이러한) '분리'는 언젠가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흑인과 백인은 동등한 존재로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고 백인은 자신이 흑인에게 '양보할' 뭔가가 있는 듯한, 또는 흑인이 그들의 흑인 특성을 '극복하다록'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무의식적인 암시를 모든 문구마다 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만남이 이뤄질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에게 위에 언급된 '분열된 개성'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 있느냐는 저의 이성을 넘어서는 판단이겠습니다만, 그가 분명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듣고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이 결국 (한 심리학자의 분석처럼) 그를 대통령으로 찍으며 백인들 스스로가 "인종은 상관없어!"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은 말콤 X(나 제가 이해한 바의 존 그리핀)의 바램대로 미국이라는 사회가 '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통합'을 그 해법으로 선택하였음을 보여주는, 조금은 서글플(?) 수도 있는 커다란 상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꿈꾸는 통합과 평등"이란 책 표지의 문구는 그러하기에 더더욱 저에게는 역설적으로 눈에 더 띄였었네요.)

 

'흑백간의 인종갈등과 그 문제'... 라고만 한정짓는다면 이 책은 2013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딱히 읽고싶은 매력을 선사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에 나타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더 크게 보아서는 「불편해도 괜찮아」에 등장했던 수 많은 소수자 집단들에 대한 다수자 집단의 편견과 횡포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사회의 다수자 집단에 속해있건, 소수자 집단에 속해있건 그 누구라도 꼭 한번은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닌가 싶네요.  저자 존 그리핀이 1979년 <'타자'를 넘어서>란 제목으로 쓴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그 핵심이 아닐까싶네요. 그 중 일부를 옮겨놓는 것으로 이 책의 감상을 마칩니다. 저자가 흑인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했던 순간 느꼈었었던 상황, "내가 가진 인간 개인의 자질을 보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내 피부색을 보고 판단했다"와 같은 시대, 장소에 살고 있지 않음에 새삼 이렇게 커다란 감사함을 느껴보게도 되는군요.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자신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인간적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저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죽는, 이 모든 동일한 근본 문제에 똑같이 부딪힌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진리며,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다 같이 가진 공통의 특징이다.

실제로 우리와 그들, 나와 너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보편적인 '우리'만이 있을 뿐이다. 연민을 느끼고 모두를 위한 평등한 정의를 요구할 줄 아는 능력으로 한데 결합한 인간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머리로 인식하고 그런 다음 마음속 깊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타자'는 없다는 것, '타자'란 중요한 본질적 면에서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이것뿐이다. 사람들이 인간을 학대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이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인식이 이런 사고방식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해독시켜 줄 것이다.

 

 

 

★ More "Food for Thought"

 

 - 김두식 著,불편해도 괜찮아: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영화 "밀양"을 주제로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대해 무심결에 가지게 되는 편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 「블랙 라이크 미」에도 비판적 시선을 대입시켜볼 수 있을 듯)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너의 입장이 되어 살아보겠다'의 또 다른 전형적인 사례.

- 유시민 著, 「거꾸로 읽는 세계사 : 현재의 '나'와는 상관없어보이나(결국엔 상관이 있음을 알게되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세계의 역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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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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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려 깊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배반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해 온 도덕적 양심은 지금도 존재하고 또 전에도 늘 존재해 왔다. ……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제7일」이란 소설에서 작가 위화는 '삶과 죽음' 동안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 많은 선택들, 그리고 우리는 몇몇 대안들 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음을, 그리고 그 선택과정의 대부분은 매우 슬프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지요.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한 우리는 보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맛볼 수 있고,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신께서 당신에게 이 다섯 가지의 능력 중 단 하나만을 반드시 되돌려 받으셔야하겠다라 선포하신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감각을 내놓겠다 대답하시겠습니까? 혹은 신의 심사가 매우 뒤틀려, 그 선택의 자유조차 없이 당신의 임의대로 게 중 아무거나 하나를 앗아가신다면 또 어떻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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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신께서는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앗아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네... 이 소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실명이,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헌데 신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앗아오시면서 딱 한 사람에게만은 그의 볼 수 있는 능력을 남겨 두셨습니다(물론 이 소설에서 '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전지전능한 시점의 화자만이 있을 뿐). 그 선택(?)받은 이는 다름 아닌 '눈이 멀어버린 안과의사'의 아내이지요(이 소설속 등장인물들은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안과 의사, 의사의 아내, 첫 번째 눈먼 사람, 사팔뜨기 아이, 검은 안대를 한 노인, 검은 색 안경을 썼던 여자' 이런 식으로 지칭될 뿐이지요. 아마도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것이 과연 의미가 있기나 하겠냐라 작가가 말하고 있는듯이). 허나 그 한 사람이 '안과 의사의 아내'라는 건, 즉 그의 남편이 의사인데 전공이 '안과'라는 사실은 이 소설 속에서 별 커다란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다만 그의 남편이 의사이고, 그렇기에 그녀의 교육 수준이 평균 이상일 것이라는 저의 추측만이 그녀의 행동과 말들을 그저 이해하게 만들어줄 뿐...

 

이 원인 모를 실명이 발병 전에 염증이라든가, 감염 혹은 퇴행 등의 병리적 증상이 전혀 없이 곧바로 나타나는 강력한 전염병이라는 것을 확인한 정부는 이미 실명한 자들과 그들과 접촉했던 보균자들을 격리 수용하기로 결정합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정신 병원 건물을 반으로 나누어, 한 편에는 실명된 자들을, 다른 한 편에는 곧 실명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 보균자들을 수용하지요. 이 병원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내려진 정부의 명령 들은 이미 더 이상 자신들은 너희들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것들 뿐입니다. 

 

2. 허가 없이 건물을 나가지 말라, 그 즉시 사살당할 것이다.

10. 우연히 또는 고의로 화재가 발행하더라도 소방대는 투입되지 않는다.

11. 마찬가지로 병, 무질서, 폭력 등이 발생한다 해도 재소자들은 외부의 개입을 요청할 수 없다.

12.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재소자들은 형식적 절차 없이 시체를 마당에 묻어야 한다.

수용소에는 원칙적으로 이 전염병으로 인해 실명이 된 사람들만이 격리되지만, '의사의 아내'는 자신도 실명했다는 거짓말로 남편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하지만 그녀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남편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 수용소에 넣어진 최초의 실명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들 한번쯤은 서로를 지나쳐간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지요. 물론 자신의 실명에 다들 당황하고 믿을 수 없어했지만,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거라는 희망으로 최초의 환자들은 그 상황에서조차도 '아직은 자신들이 인간임'을 잊지 않고 행동합니다(이 사실을 잊을 수 있다라는 상상조차 못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엄청난 속도의 전염으로 인해 금새 증가한 환자들로 인해 병원은 이내 곧 수 백여명의 서로 낯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고, 그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인간임'을 잊어가게 됩니다.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라는 사실, 그리고 나와 같이 있는 나머지 모든 사람들 또한 나를 볼 수 없다라는 사실은 병의 전염 속도 이상으로 그들에게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잊게 만들어 버리지요. 그 시작은 보균자 병동에 있던 사람이 실명이 되는 순간 그 병동에서 무자비하게 쫒겨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며, 이후 '의사의 아내'의 말대로 '예정된 지옥이 다가오는' 현실을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 결과를 생각해 본다면, 곧 즉각적인 결과, 확률이 높은 결과, 가능한 결과, 상상할 수 있는 결과를 차례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며, 우리 머리에 처음 떠오른 생각에 가로막혀 절대 어떤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그럴 때 우리는, 괜찮아, 하고 말한다.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것은 일반적으로 용기 있는 태도로 여겨지며, 오직 인류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지옥같은 상황하에서도 눈먼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아직은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무언가 대책을 세워 자신들을 구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그들을 감시하던 군인들마저도 하나 둘 씩 실명을 하게 되자 그들 스스로도 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식량 배급 시간에 발생된 아주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군인들은 환자들을 향해 발포를 하였고 수많은 환자들이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지도부는 그들을 굶어죽게 내버려두는 게 낫지 않겠냐, 짐승이 죽으면 독도 함께 죽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되고 결국엔 '그들이 결국 서로 죽이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 테니까'란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극단적 사고는 보균자들에게도 일어나게 되는데, 환자들이 먼저 배급된 식량을 가지고 간 후에 자신들의 순서가 오기에 항상 모자란 식량으로 인한 굶주림에 못견딘 몇몇은 '어차피 눈이 멀 거라면, 그게 우리 운명이라면, 차리리 지금 저쪽 병동으로 옮겨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절망감에 빠지고 맙니다.  

 

이 눈먼 사람들은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곧 짐승으로 변할 것인데, 더 심각한 것은, 이들이 눈먼 짐승으로 변할 것이라는 점이다. ……  '의사의 아내'는 지칠 줄 모르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 수 없다면, 적어도 완전히 동물처럼 살지는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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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은 애초에 각 병실의 책임자를 선정하라 권장하였었으나) …… 처음에 이야기됐던, 누군가 각각의 병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제안이 이런 문제들과 더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임자가 선출돼도, 그 책임자의 권위는 약할 수밖에 없고, 불확실할 수밖에 없고, 매순간 문제 제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책임자는 공명정대하게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권위를 행사하고, 다수는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야 했다. 그런 권위가 생기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이 안에서 서로를 다 죽이고 말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홉스의 국가론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세속의 신'이다." -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아귀다툼이 매일매일 발생하며, 그 다툼의 정도가 나날이 더해져가는 상황을 묘사해주며, 자연스레 '권력'이란 무엇이며 그 권력을 누가 가져야하는가 등에 관한 생각을 떠올려 주지요. 모두가 눈이 먼 그 상황에서도 '총'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쥔 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는 그의 권력을 매우 나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던 홉스나 밀의 주장과 정반대의 이름하여 '국가'가 성립된 것이지요. 하지만 그 '무시무시하지만 무식한' 권력자가 잊고 있는 한 가지를 작가는 예리하게 집어내 줍니다.

   

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권력을 찬탈할 수 있다는 생각은 …… 심각한 실수였다. 결과는 그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가 총을 쏠 때마다 총알이 거꾸로 튀고 있는 셈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총을 쏠 때마다 조금씩 권위를 잃어갔다. 따라서 총알이 다 떨어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보자. 수도사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이 아니듯, 왕의 홀을 쥐었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경제학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타주의자들만 모여 살고 있는 사회에 한 사람의 이기주의자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서로를 도와가며 살고 있는 이타주의자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그는 계속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합니다만, 자신을 제외한 사회의 수많은 이타주의자들 덕에 아무런 불편함없이 살아가게 되고, 이를 지켜본 이타주의자들 중 몇몇은 자신도 이기주의자와 같이 행동하게 되고 결국 그 사회의 나머지 모든 이타주의자들이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또한 그 반대의 경우, 즉 이기주의자들만 살고 있는 사회에 들어간 한 사람의 이타주의자는 역시 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지극히 비관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모두가 눈먼 사람들인 사회에 속해있는,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인 '의사의 아내'가 과연 어떠한 행동을 취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과연 '이기주의자들의 사회'에 속한 유일한 이타주의자라 칭할 수 있겠는 그녀 또한 결국 (뜻 그대로의)이기주의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인가에 대해서도 읽는 이의 궁금증을 끄집어내어 주지요.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 소유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나하면 우리는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우리의 인간성조차 쉽게 말살하는 장님이기에 눈을 비벼 눈곱을 뗀 후 세상을 다시 보아야하다는 필요성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작품 해설>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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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악에서도 선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에서도 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순들이며, 경우마다 둘 가운데 어느 한쪽을 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 혹은 권력이란 것이 무엇인가,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의 개인들은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이라는 것은 어떻게 확인되어질 수 있는가... 등등 이 소설이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은 너무도 많아 한 번의 독서로 그 모든 것을 다 집어내고 이해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과연 이 사회는 어떻게 흘러가는 것으로 결말지어질까에 대한 궁금증, 작가가 꼬집어 내어주는 인간성에 관한 세밀하고고 적나라한 묘사, 그리고 반드시 언급해야할, 등장 인물의 이름도 없고 마침표와 쉼표를 제외한 그 어떠한 문장 부호도 없는 이 소설을 정말 찬사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도록 멋지게 번역해내신 정영목 번역가의 능력...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야말로 '내 인생의 책 한 권'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하루밤의 꿈"같은 작품입니다(소설의 결말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적 문구입니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의 머릿말에 나오는 구절이 어쩌면... 이 작품의 한 가지 주제만큼은 잘 설명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그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이런 작품을 읽었다라는 게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라는 거, 그러나 '이제서야' 읽었다라는 아쉬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던 책이었네요. 

 

 

혁명은 사람들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는 사회에서 일어난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수없이 터져 나왔던 혁명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

 

 

★ More 'Food for Thought' 

 - 유시민 著  「국가란 무엇인가」 : 우리에게 왜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 지도자는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배울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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