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의문을 다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흑인이 억압당하는 땅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하려 했다. …… 흑인 .남부. 이런 것은 세부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 담긴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하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마저 파괴되는)사람들에 관한,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다. 또한 이 이야기는 박해받고, 빼앗기고, 미움 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독일에 있는 유대인일 수도 있고, 미국 내 흩어져 사는 멕시코 사람일 수도 있으며, 그 어떤 '열등한' 집단에 속한 어느 누구일 수도 있다. 세부적인 것만 다를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다.
- 저자가 쓴 <머리말>중
저자가 흑인이 되어 경험했던 현실적 차별들은 2013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충분히 넘어서는 것들이었습니다. 흑인은 고급 레스토랑 앞의 메뉴판조차도 읽어서는 안되며, 아무 화장실이나 들어갈 수도 없고, 백인 여성 심지어는 백인 여성의 모습이 있는 영화의 포스터까지도 보아서는 안되며, 시내버스 기사는 흑인인 그가 하차벨을 여러 번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여덟 블럭이나 더 가서, 그것도 백인 손님이 내릴때에야 그가 버스에서 내릴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기도, 미시시피로 가는 고속버스는 10분간의 정차 중에 백인 승객들에게는 차에서 내려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흑인들에게는 하차를 할 수 없도록 막아서는 등 과연 이러한 일들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실제 있었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군요.
"모빌에서의 보냈던 3일간. …… 이번에도 내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모든 백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것, 예를 들어 식사할 만한 곳, 물을 마실 수 있는 곳, 화장실, 손 씻을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정작 저를 더 놀라게 해주었던 것은 이러한 현실적 차별이 아니라, 백인들 마음 속에 그들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 못할만큼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흑인에 대한 증오와 잘못된 편견, 그리고 더욱 심각하게는 흑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자기비하였었었지요. 이에 관해 그리핀은 라이오넬 트릴링이 말한 '학습된 행동 양태가 너무 깊어 몸에 배어 무심결에 반응이 나오는 것을 문화라고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흑인인 자신 앞에서 백인들이 보여주었던 일련의 모습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습니다.
"겉치레일망정 흑인에게는 자존감이나 인격 같은 것도 보일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다. …… 백인은 자기 본성의 가장 품위없는 측면을 이렇게 내보이면서 어떻게 자기가 원래부터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잇는지 흑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 지금 내가 차 안에서 보는 모습은 자기 자신에게도, 함께하는 상대에게도 아무런 존중의식을 보이지 않는 그런 식의 모습이었다."
"그들(백인들)은 흑인이 도덕성이 몹시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짓을 해도 기분이 상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부류는 젊은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흑인을 기계처럼 대하는 사람에 비하면 덜 불쾌한 편이다. 흑인은 인간 존재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핀은 자신이 만났던 흑인들의 말을 통해 1959년 당시 미국 백인들이 가지고 있던 흑인에 대한 편견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흑인은 머리가 나쁘며 선천적으로 폭력적이고,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는 등등의 편견이 실제 흑인이 그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백인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내몰았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이는 「노동의 배신」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청결하지 못하고 병에 자주 걸리는 것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인 것이지 결코 그들이 청결하고 건강할 수 있음에도 그러한 생활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거지요.
● 흑인은 교육 수준이 낮아요. 자녀는 교육시킬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흑인은 교육을 받아도 백인과 같은 직업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가정생활이니 고상한 생활수준이니 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 저들은 우리가 돈을 벌 수 없도록 만들어놓고는, 결국 수입이 없어서 세금을 많이 낼 수도 없게 하지요. 그리고는 자기들이 거의 모든 세금을 내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악순환이지요. …… 저들은 우리를 낮은 곳으로 밀어놓고는 우리가 저 아래 뒤처져 있는 게 우리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는 열등한 존재이므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요. …… 흑인의 경우에는 뭔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걸 알지만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일과 공부 저 너머에 더 나은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지 못해요.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태어났어요. 이건 흑인이든 백인이든 다른 어느 인종이든 똑같지요. 자라면서 이 빈손이 채워지는 거예요. 빈민가에서 더럽고 가난한 삶을 보면서 자란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의 빈손은 매우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요.
- (흑인)그리핀이 만난 흑인들의 말 중
● 흑인은 이등 시민조차도 되지 못한 채 거의 10등 시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흑인의 하루 일상은 온통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계속 확인받는 일로 이뤄져 있다. 더 나은 직장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계속 거절당할 때, …… 주변에 화장실이나 음식점이 있는데도 흑인용으로 지정된 곳이 아니면 그냥 지나쳐야 할 때, 이런 일은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신경이 전혀 무뎌지지 않는다. 아픔을 일깨우는 새로운 상황이 쓰린 상처 위에 또 다시 상처를 입히고, 상처는 더욱 깊어만 간다. …… 흑인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받는 길은 이 모든 일이 자기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종, 자기 피부 속에 들어 있는 색소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는 오래전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이다. 어머니, 이모, 선생님은 오래전부터 세심한 손길로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켰고, 비록 흑인일 때는 그럴 수 없지만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얼마든지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다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 (백인)그리핀의 독백 중
.
.
.
책의 후반부에는 이 책이 출간된 이후의 변화된 상황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미국 사회에도 조금씩 인종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고, 흑인들 또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같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하게 되지요.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침해하는 모든 법률과 제도, 관습에 저항하는 비폭력운동을 통해 '흑백인의 평등과 통합'을 주장하며 다수의 지지를 받았습니다만, 이와는 다르게 '흑백의 분리'를 통해 인종 문제를 해결하려는 말콤 X를 중심으로 한 세력도 등장했었었지요.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었을 당시 제가 가지게 되었던 생각은 통합이 아닌 분리가 더 적절한 방식이 아닐까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저자 존 그리핀 또한 책의 몇 곳에서 (말콤 X의 주장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리'가 더 적절한 해법이다라 읽힐 수 있는 의견을 내놓고 있지요.
● 통합된 사회라는 오래된 꿈을 버린 흑인 사상가는 체제 속에 배어 있는 약점을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이 약점 중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이른바 '분열된 개성'이었다. …… 분열된 개성이란 이 사회에서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흑인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흑인은 성공하기 위해 백인을 모방해야 했다. 백인처럼 옷을 입고, 백인처럼 말하며, 백인처럼 생각하고, 백인 중산층 문화의 가치를 표현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아, 흑인 존재, 흑인 문화를 수치스러운 것처럼 숨기고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성공을 이룬 사람은 소외된 주변인이 되었다. 흑인 문화의 장점으로부터도, 동료 흑인으로부터도 소외되었고, 그의 얼굴에 드러난 색소 때문에 백인으로부터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 취급을 당하고 결코 가짜 백인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궁극적으로 (이러한) '분리'는 언젠가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기 위한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면 흑인과 백인은 동등한 존재로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고 백인은 자신이 흑인에게 '양보할' 뭔가가 있는 듯한, 또는 흑인이 그들의 흑인 특성을 '극복하다록'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무의식적인 암시를 모든 문구마다 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만남이 이뤄질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에게 위에 언급된 '분열된 개성'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 있느냐는 저의 이성을 넘어서는 판단이겠습니다만, 그가 분명 '백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을 듣고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이 결국 (한 심리학자의 분석처럼) 그를 대통령으로 찍으며 백인들 스스로가 "인종은 상관없어!"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것은 말콤 X(나 제가 이해한 바의 존 그리핀)의 바램대로 미국이라는 사회가 '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통합'을 그 해법으로 선택하였음을 보여주는, 조금은 서글플(?) 수도 있는 커다란 상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꿈꾸는 통합과 평등"이란 책 표지의 문구는 그러하기에 더더욱 저에게는 역설적으로 눈에 더 띄였었네요.)
'흑백간의 인종갈등과 그 문제'... 라고만 한정짓는다면 이 책은 2013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그 누구에게도 딱히 읽고싶은 매력을 선사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대로, 또한 우리 대한민국의 현재에 나타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더 크게 보아서는 「불편해도 괜찮아」에 등장했던 수 많은 소수자 집단들에 대한 다수자 집단의 편견과 횡포에 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이 책은 사회의 다수자 집단에 속해있건, 소수자 집단에 속해있건 그 누구라도 꼭 한번은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닌가 싶네요. 저자 존 그리핀이 1979년 <'타자'를 넘어서>란 제목으로 쓴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그 핵심이 아닐까싶네요. 그 중 일부를 옮겨놓는 것으로 이 책의 감상을 마칩니다. 저자가 흑인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했던 순간 느꼈었었던 상황, "내가 가진 인간 개인의 자질을 보고 나를 판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내 피부색을 보고 판단했다"와 같은 시대, 장소에 살고 있지 않음에 새삼 이렇게 커다란 감사함을 느껴보게도 되는군요.
모든 인간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자신과 자기 아이들을 위한 인간적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그저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죽는, 이 모든 동일한 근본 문제에 똑같이 부딪힌다. 이는 모든 인간 안에 들어 있는 기본 진리며, 모든 문화, 모든 인종, 모든 민족이 다 같이 가진 공통의 특징이다.
실제로 우리와 그들, 나와 너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보편적인 '우리'만이 있을 뿐이다. 연민을 느끼고 모두를 위한 평등한 정의를 요구할 줄 아는 능력으로 한데 결합한 인간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머리로 인식하고 그런 다음 마음속 깊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타자'는 없다는 것, '타자'란 중요한 본질적 면에서 바로 '우리 자신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문화의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오로지 이것뿐이다. 사람들이 인간을 학대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이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인식이 이런 사고방식의 독성을 중화시키고 해독시켜 줄 것이다.
★ More "Food for Thought"
- 김두식 著, 「불편해도 괜찮아」 :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 (영화 "밀양"을 주제로 비장애인이 장애인에 대해 무심결에 가지게 되는 편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 「블랙 라이크 미」에도 비판적 시선을 대입시켜볼 수 있을 듯)
- 바버라 애런라이크 著, 「노동의 배신」 : '너의 입장이 되어 살아보겠다'의 또 다른 전형적인 사례.
- 유시민 著, 「거꾸로 읽는 세계사」 : 현재의 '나'와는 상관없어보이나(결국엔 상관이 있음을 알게되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세계의 역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