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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1 : <남기한 엘리트 만들기>란 웹툰을 기억합니다. 어른의 정신과 경험, 지식 등을 그대로 가지고 초등학생의 몸으로 변하게 된다는 스토리였었죠. 검색해 보니, 지금은 유료로 전환되어 다시볼 수가 없는데, 암튼 --- 초딩 불량배들(?)에게 '눈알을 빼서 삶아먹고, 내장을 빼서 곱창 볶음 만들어버릴까~'란 류의 욕을 하는 남기한, 그리고 그런 욕을 처음 들어본 초딩 불량배들의 얼빠진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정신은 어른인 남기한에게 그런 류의 욕은 딱히 심한 것이 아니었었었건만, 그 시절의 초딩들에겐 무지막지한 충격이었던 거죠.
■ #2 : 이번엔 현실 속 실제 이야기입니다. '박한상'이란 놈이 있었었지요. 돈 많은 집의 장남인데, 머리는 아주 꼴통이었나 봅니다. 암튼 이 자식 결국,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자기 차지가 될 부모님의 재산에 환장해 부모를 죽였었지요. 그렇게 그 녀석은 (이것 역시 정확한 건 아닌데) 제 기억에, '최초의 존속패륜 사건'의 주인공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됩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충격을 실로 대단했던 것이었었죠. 세상 말조라는 둥의 탄식이 이어졌었었거늘, 다행히도(?) --- 아직도 세상의 종말을 실현되지 않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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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살아 있다거나 죽었다고 느끼는 건 어느 한 순간이야. 그냥 평범하게 살아 있거나 죽어 있다가, 어느 날 불현듯 아, 내가 살았구나, 아, 참, 내가 죽었지, 이런 생각이 든다구. (p110) - <문득,> 중
분명 시간은 연속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또한 100%에 가까운 '거의 모두'가 그렇게 연속적/점진적으로 진행되어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밤, 잠자리에 들 때엔 분명 없었던 눈가의 주름이, 이마 위 앞쪽의 흰 머리가,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는 거지요. 허나! --- 몇 달만에 의식적으로 관찰(?)해본 내 아내의 눈가와 저의 이마 위 앞쪽엔 주름과 흰 머리가 보였을 때, 우리의 입에선, 너무도 자연스레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지?'란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
2017년 9월 14일 오후의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살아내고 있는 이 세상,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지금 이 모습도 또한, 그처럼,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찰하지 않았/못했었을 뿐,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적/점진적으로 변화되어 온 결과인 겁니다. 박한상이란 꼴통 새끼의 패륜이 1994년엔 실로 놀라운 충격이었었으나, 그 이후 현재까지 이 땅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존속 살인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이유로 '세상 말조'란 말을 하지는 않게 만들어 주었지요. 이 단어가 적합한지는 자신 없으나 암튼, ---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이 변해가는 것이 '익숙'해져 온겁니다.
제 기억에, 일본의 사회 문제라는 '이지메'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고, 그로부터 '왕따'라는 현상이 카피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대한민국 부산이란 곳에서, 또한 강릉이란 곳에서 나타난, 그 (2017년 현재의 기준에서 보아) '극한'의 현시(顯示)는 우리로 하여금 기어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란 표현을 끄집어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나! --- 1994년 박한상의 패륜이 2017년의 기준으로 보아 더 이상은 '세상 말조'의 징조가 될 수 없듯이, 앞으로 25년 여후, 어디선가 진짜로, '눈알을 빼서 삶아먹고, 내장을 빼서 곱창 볶음 만들어버릴까~'란 욕을 당당히! 현시(顯示)해 보이는 중삐리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라는, '에이, 그래도 그건 절대 안그럴꺼야'란 말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가 정답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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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참지 못하는 날이면 담뱃불을 가져다가 가슴팍에 댔다. 담뱃불이 타는 동안 신경의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 노인이 생각해낸 치료는 통증이 오면 통증을 잊을 만큼 큰 자극을 주는 게 다였다. (p173) - <서쪽 숲> 중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 하여, 나의 불행이 덜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더 불행한 경우를 들려줌으로써 나의 불행에 대한 자위(自慰)를 권면하는 수준인 것이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는 위로 대부분의 수준인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 예를 들어, 경제적 곤궁함에 대한 위로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그의 가족들이 지금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류의 사뭇 어처구니 없는 비교가 거론된다거나, 조선시대 임금님도 못드셔본 음식을 드시고 계신 거라는, 시계열을 깡그리 무시한 단순무식의 사기(詐欺)성 위로 등이 그러하지요. - 이같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자신 스스로의 아픔을 이겨내는 일 방편으로서 애용되는 --- 운전중 오른발의 발바닥이 간지럽다면, 입술을 깨문다라든가, 연인과의 헤어짐에 마음(심장)이 아려와, 진탕 마신 술로 또 다른 속(위장)을 괴롭힌다라든가 등의 닮은 꼴로,
"소설은 위안을 줄 수 없다.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함께 느끼고 있다고, 우리는 함께 존재하고 있다고 써서 보여줄 뿐."
- 성석제, 「투명인간」의 <작가의 말> p370, 창비, 2014.
마치, 이로부터 12년 후인 2017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해, 미리 예방주사라도 맞으라는 듯, 2005년 써내었던 이 불편한 소설들, 뭐 권말의 <해설>에 말하듯, 2005년에는, 어쩌면 '아오지 탄광'의 말장난도 누군가는 했었을 법도 한, 그렇게 대략 "하드고어 원더랜드"였었을 꺼라 짐작되는 이 소설들은, 작가 편혜영의 예상(?)이 너무도 정확히도 들어맞은 것처럼, --- 2017년의 독자인 저에게는 딱히 '하드'하지도 않았고, '고어'스럽지도 않게 느껴졌다라는, 그저, 아주 가끔식, 분필과 칠판 간 매우 특별하며 특정한 각도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그 '끼이익' 소리처럼, 단지 '불편함'만이 느꼈졌었을 뿐이라는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감상만이 남습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뭐랄까...
이 소설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이제까지 살아왔었었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2005년부터 2017년 지금까지 제가 경험해왔던 그 수많은 '현실'이란 게, 저를 이렇게 성숙(?)하게 해주었으며, 뭔가 이 현실에 대한 일종의 프리퀄인 듯, 이제서야 읽어보는 편혜영의 소설들로부터, 사뭇, 나가는 길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는 상태에서 미로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의 안도감같은 걸 느꼈었다라고나 할까요? 아, 참!
이 소설집에 담겨 있는 모든 소설들이,
후각을 매우 중요시하게 다룬다라는 점은 매우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전,
향기에 매우 매우 약한 남자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