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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이 만든 결정적 순간들
함규진 지음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인간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 부족한 생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싸우고, 이미 넉넉하지만 더 넉넉해지기 위해 싸우고, 어떤 경우에는 그저 일상의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또는 내부의 불화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싸웠다. … 그러나 전쟁의 역사 이면에는 다른 역사도 있다. 싸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약속으로 해결했던 역사, 곧 조약의 역사다. (p7)
한 마디로 인간의 역사를 싸움과 화해의 과정으로 본다라는 것이며, 이 책의 부제인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이 만든 결정적 순간들"이 의미하는 바, 그러한 싸움과 화해가 - 주로 '화해'의 경우이겠지만 -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로, 어떻게 합의되어 문서로 남게 되었는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이 책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의 내용입니다.
'조약(treaty)'이란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일 간략하게 핵심만 말하자면 조약이란 결국 "국가 사이의 약속"(p461)이라 책은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걸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자세하게 보자면 --- ① '국가'간에 이루어지는 약속이라는 점, ② 그 약속은 1:1 간의 약속뿐 아니라 다자간 약속일 수도 있다라는 점, 그리고 ③ 그 약속은 상충하는 이기심들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라는 점 등을, 이 책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주요한 포인트로 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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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가 뭔데? 】
'조약'에 관한 협약이라는 <빈 협약>에 따르면, 조약은 "국가 간에 맺는 것이다. … 국가로서 승인받지 못한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도 조약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p109)라 합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사람에겐 공통적으로 딱~하고 떠오르는 게 있지요. 바로 '북한'! --- "대한민국은 북한을 국가로 공식 인정하지 않으며, 북한 역시 마찬가지"(pp464~465)인 상황이 지속되는 한, 남과 북 사이의 그 어떠한 형태의 '약속'은, 말이 약속이지 그 어떤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지난 2,000년 체결된 <남북한 경제협력 합의서>는 '조약'이 아닌 (명칭에서부터도 이미 단지) '합의서'일 뿐입니다만, 당시 남과 북은 이 '합의서'를 지킬 의사가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양측에서 모두 (굳이 필요한 절차가 아니었던) 국회의 비준 절차까지를 모두 거쳤었지요. 그렇게 해 탄생했던 개성공단은, 그럭저럭, 암튼 어찌해서든 계속 유지는 되어왔었습니다만, 북한의 4차 핵실험을 계기(?)로 2016년 2월,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에 의한 '대통령령'의 발효와 함께 전격적으로 폐쇄됩니다. 여기에 어떤 재미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다시 한 번, 빈 협약에 따르면) "조약과 맞지 않는 국내법으로 그 조약의 이행을 부정할 수 없다"(p110)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법보다도 하위법인 '대통령령'으로 <남북한 경제협력 합의서>를 가볍게(?) 어길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약속'이 '조약'이 아닌, 엄밀하게 말해, "어느 한쪽에서 이를 어긴다해도 정치적 부담을 질지언정 국제법적 배상 부담은 없는"(p465) 단순한 '합의서'였다라는 점을 남한 정부가 이용하였다라는 점이지요. 게다가,
제 아무리 박근혜가 개판을 치고 사라졌다 해도, 그리하여 일각에서 다시 개성공단을 재개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해도, 그러한 주장 역시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일 수밖에 없는 이유란 게 --- 당시 박근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의 결실"(p467)로 이루어졌던 UN 안보리 2321 결의안이 '납득할 만한 개선이 있기 이전의 대북 경제협력 금지'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UN 안보리 결의안은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 결의안은 대한민국에서는 <남북한 경제협력 합의서>보다 상위법으로 인정되며, 북한이 '납득할 만한 개선', 즉 북핵 포기나 인권 상화을 대폭 개선하기 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의지만으로 대북 경협을 재개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p467)
정리해 보자면, <합의서>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령'으로도 간단히 어길 수 있는 것이고, <UN 안보리 결의안>은 국내법보다 상위인 국제법이기 때문에 어길 수가 없다라는 것이죠. 이처럼 --- '조약'이란 건, '약속'의 상대가 누구냐인지에 따라 그 이행과 파기가 정당화될 수도 있는, 아주 요상한(?) 약속이다라는 첫 번째 배움입니다.
【 나도 끼워주면 안되겠니? 】
대체적으로, '뭉치면 살 수 있다'라는 정신은 국제 사회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항에 대한 약속의 요구인지라 거부의 의사를 밝혔으나, 그 약속에 한두 나라가 아닌 은근 많은 나라들이 뜻을 모으게 되면 뭔가 나도 모르게, 그 조약에 참가하지 않는다라는 게 좀 불안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죠. 1875년에 체결되었던 <미터 조약(Convention of Meter)>이 규정한 미터법에 여전히 동참하고 있지 않는 나라인 미국도, 차마 미터법을 법제화하지는 않았지만 '합법화'는 해주었다라는 게 그 일례가 될 수 있겠죠. 이와는 반대로,
나를 끼워주지 않은, 그런데 꼭 끼고 싶은 조약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북대서양조약(NATO : The North Atlantic Treaty)>은, 한 마디로 '우리끼리 뭉쳐서, 우리들 중 누구 하나한테 덤비는 놈이 있으면 다 같이 패준다'라는 약속이지요. 몸이 허약하고 싸움을 못하는 국가에겐 정말 가입하고 싶은 조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NATO는, 조약의 이름에도 나와 있듯, 소련을 제외한 유럽의 국가들이 맺은 조약임에도, 이상하게 그 주동자이자 대장은 또 미국이었습니다. 소련이라는 힘 센 국가를 상대하려면, 우리 쪽에서 힘 센 대장이 있어야 하는 이유에서였지요. 암튼!
NATO가 결성되고 난 후, 북대서양에서 한참이나 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소련이 그 전쟁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NATO가 한국 전쟁에 나설 명분은 없지요. 바로 이 때! --- 한국 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도와주었던 터키를 일컬어 '형제 국가'였던가 하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최소한) 반대는 하지 않습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헌데 말입니다, 그러한 고마움을 베풀어 주었던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매우 중요한 부분이,
터키가 1만 5천 명, 그리스가 1만여 명의 병력을 한국에 파병해 미국, 영국, 캐나다에 뒤이은 대규모 파병 국가가 된 저변에는 나토 회원국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 대가였는지 한국전쟁에서 수백 명의 전사자를 낸 두 나라는 1952년에 마침내 첫 추가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p268)
물론, 좋은 건 좋은 것이지만, 또한 좋은 것이라 해서 다 좋기만한 건 아니라는, 사뭇 냉정/치열/잔인한 국제 사회의 역학 관계의 현실이, 이 책이 제게 준 두 번째 배움이었습니다. 뭐 이런 냉정/치열/잔인함이란 게 비단 국가간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요?
【 티격태격 】
'발목 지뢰'는 일부러 밟은 사람의 발목만 날려 버리도록 폭발력이 억제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상당한 전우를 두 사람 이상이 옮기느라 그만큼 가용 전력을 줄어들게 만들려는 의도다.(pp220~221)
이걸 두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최소한의 예의라 표현해야 할까요, 아님 극한의 잔인함이라 해야 할까요? 국가간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어떠한 이유도, 전쟁에서의 승패를 떠나 그것이 낳는 참담한 결과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겠거늘, 그 전쟁을 차마 끊을 수 없겠는 인류는 기어이 "전쟁 자체를 없애려는 게 아니라, 전쟁을 최대한 덜 비참하게 만들려는 협약"(p206)까지 맺어가며 전쟁을 할 수도 있다라는 의지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지요.
언제 나의 적(enemy)이 될지 모르는 누군가와 '약속'을 맺는다라는 건, 그러하기에 이기적인 둘 또는 여럿의 밀고 당기기라는 지난한 과정을 겪고 나서야 탄생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너의 이기심과 나의 이기심'이 한데 뭉쳐, '우리의 이기심'이 되기도 하지요. 요즘 들어, 우리나라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핵확산금지조약>도 그런 이기심의 한 예입니다. 그 조약은 바로,
기존의 모든 무기를 '재래식'으로 만들어버린 이 놀라운 무기를 어떻게든 우리 손에 넣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갖는 일은 막아야 한다! 우리의 안보 우위가 무너질뿐더러 세계가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에. (p299)
이 좋은(!) 건, 걍 우리만 가지고 있자,라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지요. <핵확산금지조약>의 골자란 게 결국엔 "기존 핵보유국의 핵 보유는 인정하되 더 이상의 핵 확산은 금지하고, 핵보유국은 순차적으로 핵군축을 (위해 노력)한다"(p301)라는, 이 살벌한 국제 사회에서의 이기심이, 새삼스럽지 않은 세 번째 배움이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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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기독교 문명국이 할 짓이 아니라는 주장과 영국인과 영국의 재산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데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섰다. 결국 1840년 4월 10일에 의회는 271대 262로 파병을 승인했다. 이로써 1840년 5월, 16척의 군함(보조함까지 총 44척)과 4,000명의 병력이 중국으로 출발했다. (p150)
영국과 청나라 간 '아편전쟁'이란 게, 왕/여왕이 '가서 아작내고 돈 좀 뜯어내라!'라 명령을 내려 시작되었던 건 아니더군요. 엄연히 법에 규정되어 있는 절차를 거친 결정이었던 겁니다. 암튼, 그때 딱 4명의 선택만 바뀌었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수 있었었던, 이처럼 어떤 '약속'을 도출해내기 위한 협상 과정에서의 티격태격은 국가 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중요성은 국내/국가 간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걸 또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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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해주고 있는 <한중 어업협정>의 불완전성을 알고 나면, 서해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획을 그저 '짜장들의 무식함'이라고만 욕할 수도 없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됩니다. 또한, 개인 간뿐만이 아니라 국가 간의 신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조약이란 일시적 약속이고 임시적 방편일 뿐이며, 각자의 이익에 따라 끊임없이 싸우고 속이고 빼앗는 것이야말로 불변하는 국제사회의 현실"(p9)이라는 지적은 참으로 옳은 것이다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당신이 2015년의 <한일 위안부 협정>은 파기되어야 한다라 주장하고 싶다라면, 이 책을 통해 어떠어떠한 근거로 그 파기를 주장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기도 합니다.
특정 분야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구조의 책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일단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내용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저자의 서술 또한 '물 흐르듯하다'라는 표현의 전형적 예로 추천하고 싶을만큼 자연스럽고 쉽게, 인류의 지난 시절들을 설명해 주고 있지요. 다만, 담고 있는 내용의 방대함이 부담감을 준다라는 아쉬움이,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라는 제목이 좀 이상한, '보는'과 '강의'라는 단어 간의 매칭이 심히 어색하지 않나란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전공할 사람은 더더욱 못되며, 전문가적 지식을 독학으로라도 쌓겠다라는 의지마저 없는 저에겐, 이렇게 한 번 배워놓고, 앞으로 관련된 내용이 화제거리가 될 때마다 펼쳐 다시 보게 될 것이 틀림 없는 책이기는 합니다. 사놓은지 오래된, 이와 비슷한 구조의 역사책을 조만간 펼치게 하는 계기가 되어줄 듯도...
...금연 144일째
- "이 책에는 모두 68개의 조약 이야기가 실려 있다."(p11)
- "조약은 전통적으로 agreement, convention, covenant, pact 등으로 불렸으며 이는 다시 협약, 협정, 합의 등으로 번역되면서 의미상의 혼란을 주기도 했다. … 빈 협약 이후로는 그 명칭에 상관없이 모두 조약(treaty)으로 동일한 국제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p10)
- "남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정식 승인하지 않고 있는 한, 남북한 사이의 '기본 합의서'나 '불가침 협정'은 원칙적으로 조약의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p109)
- 이 책의 저자는 이 구절에 작은 따옴표 표시를 해놓고 있습니다.
- 여차저차하면 어찌해서든 개성공단을 재개할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다,라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문제에 있어 이러한 법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정치 수준이라 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바뀜은 물론이고 과거에 자신들이 추진했던 정책조차 여야 입장이 바뀌면 거부 대상으로 삼는 일까지 벌어졌다. 꾸준하고 내실 있는 대북 정책이 자리 잡기 어려웠던 이유다."(p328)
- "미국은 1866년에 미터법을 법제화한 것이 아니라 '합법화'하는 데 그쳤다. 야드-파운드를 미터-킬로그램으로 대체하지는 않되 미터법을 개인적으로 쓰는 일을 법으로 막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p170)
- <핵확산금지조약> 뿐만 아니라, 이후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 또한 이기심의 극명한 예이지요. pp311~31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