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발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평점 :
품절


 

"권력과 영향력은 둘 다 타인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향력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고 하지, 상황 그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 모이제스 나임 著, 「권력의 종말」 p69, 책읽는수요일 刊, 2015.​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미래는 내가 합의한 질서"1라는 설명에 대한 ---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일단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대한민국이 고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政體)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주어진 기본 전제 조건"이란 당시의 생각, 그리고 (지금도 변함 없는) 이 생각의 기저에는 '권력의 존재 자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음' 이란 대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제게 주어져 있는 선택권은, 정체까지를 바꿀 수는 없은, 그저 '그 정체의 현시인 국가를 다스리는 (여러 계층의) 권력자'를 누구로 선출할 것인가에 더해지는 한 표 뿐이란 거지요. 헌데 이를 반대의 각도에서 보자면,

선출된 권력자 역시, (국가의 정체와 같이, 넓은 범위에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닌, 일정한 기간동안만 발휘되는 (제한적인, 그러나 그 제한 내에서는 나름 막강할 수도 있는) 영향력을 위임/부여받았을 뿐이라는 해석 또한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순조로운 사회생활'의 영위를 위해 조직된 '국가'라는 기구2가, 자신의 존재 이유인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내 도시지 네 도신 줄 아니?"(p76)처럼, 지배의 도구로 변질되어, 그 지배의 대상3으로 '국민'을 취급하게 되어 버리는 현실 또한, 비단 과거의 역사 속에서 뿐 아니라, 2017년 현재의 세계에서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 바로 그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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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살고 있는4 작가가 쓴 7편의 단편 소설들이 묶여 있는 소설집입니다. 소설의 내용들은, 약간 함부로 써본다면 ---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가 기존의 교육으로부터, 또한 뉴스들로부터 보고 들어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땅에 생명을 낳을 때 그 생명이 복되기를 바라서이지 한뉘를 가시밭을 헤쳐야 할 생명임을 안다면 그런 생명을 낳을 어머니가 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p40)

​라는 구절에서 보여지는, 뱃속 아이를 일부러 유산시킨다라는 내용이 (작가의 의도완 달리) 어마어마한 비감(悲感)같은 걸 선사해주지는 못합니다. 북한 사람들에게만 이 세상이 '가시밭'인 건 아닐 수도 있는거니까요. 더 나아가 ---"누구나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될 공산주의 미래"(p92)가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란 것 역시, '개인의 소원은 시대의 제약을 넘어설 수 없다5'란 일반적 명제 앞에선, 딱히 그들에게만 주어진 불행이다라 주장되어질 수도 없다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이처럼,

"​불과 사십오 분 안에 도시에 널려 있던 100만의 군중이 광장에 모여들다니! 무슨 힘이, 그 무슨 힘이 이 도시로 하여금 이런 불가사의한 사변6을 낳게 하고 있는 것일까?"(p73)

비록, 이 책 속 이야기들에 표현되고 있는 "마귀의 마술"(p176)과도 같은 김씨 가문의 지배가 "속엔 독재의 칼을 품고도 겉으로만 평등이요, 민주주의요, 역사의 주인이요, 지상낙원 건설이요 하는 허울 좋은 간판"(p261)임에 틀림이 없을지언정, 어쨌든! --- "체질화된 그 어떤 타성"(p121)"복종의식이라는 관념"(p132)을 통해 북한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무대자감7"(p189)의 경지에까지 이르르게 만들었다라는 사실 자체만큼은, 실로 놀라운 것이란 생각을 아니해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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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구약성서 욥기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부자이면서도 고결한 품성을 가진 욥은 신의 시험을 받는다. 신이 사탄에게 시켜 욥에게 온갖 종류의 고통을 준 것이다. … 신은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신은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는 식으로 말한다.

- J. 스티븐 랭 著, 「교양인을 위한 바이블 키워드」 p420, 들녘 刊, 2007.

​소설 속 인물은, 그러니까 곧 작가는 "억압, 통제하는 곳일수록 연극이 많아지기 마련"(p209)이라고, 그러나 또한 "연극무대란 막이 꼭 내려지기 마련"(p209)이란 말을 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를 믿어라"란 (엄연히 '신적 존재'인) 3대에 걸친 '최고 존엄'들의 주문(spell)에 무조건적 복종을 보여왔던 북한 주민들이 이처럼 --- 어느덧 서서히 "그 어떤 절대의 힘 앞에서 당해야 하는 억울한 좌절감"(p122)을 느끼기 시작했다라는 사실이, 그렇게 생겨난 '자신들이 도대체 왜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이처럼 문학작품이라는 형태로까지 표현되어 밖으로 알려졌다라는 건 드디어!

"권력은 다른 집단과 개인들의 현재 또는 미래의 행동을 지시하거나 막을 수 있는 능력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권력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여 그들이 하려던 것이 아닌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 모이제스 나임, 위의 책 p50.​

'그들이 하려던 것이 아닌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으로서 정의(define)되는 ('영향력의 차원이 아닌) '권력'이란 것이, 드디어 북한 정권에서도 조금씩 '(진정한8) 종말'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제게 해보게 해주었다라는 이 단 한 가지! --- 이것이 제가 이 일곱 편의 소설들을 읽고 얻은 유일한 배움이었었으며, 그러나 이 단 한 가지만으로도 당신에게 이 작품들을 읽어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노라,라는 권유를 주저없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까지는 '당위'의 개념으로 제게 인식되고 있는 '통일'이란 것이, 어느덧 혹시 "체질화된 그 어떤 타성"(p121)인 것은 아닐까/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보게도 되는 이즈음 --- 북한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일의 대상'으로부터 거두어, 그저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라는 '보편적 인간애'으로 바꾸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란 저의 생각에까지도... 이 일곱 편의 소설들을 읽어낸 후,

어쩌면 당신 역시 동의해주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1. 하승우 著, 「아나키즘」 p12, 책세상 刊, 2008.
  2.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 Leviathan』(1651)을 통해, '인간은 자연 본성에서 오는 자만과 교만으로 인하여 서로 협력하여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한 피조물이기에 그들의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구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였습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3. "통치 권력에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통치하는 방식은 항상 거의 동일하다. 선거로 권력을 쥔 지배자들은 민중을 마치 사나운 황소를 길들이듯 취급한다. 정복자들은 백성을 노획물로 여기며, 권력을 세습받은 자들은 백성을 그들의 당연한 노예로 간주한다."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 p65, 생각정원 刊, 2015.
  4. 이 책 속 소설들의 창작 시기는 1989.12.부터 1995.12.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이 쓰여진 것이 벌써 22년 전이니, 이 작가가 아직도 '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겠네요.
  5. 일종의 '삶에 주어진 기본적 전제 조건'.
  6. "믿으려야 믿을 수 없고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도 없는 현실"(p46)
  7. "무대에서 꾸며지는 연극을 배우들이 진짜처럼 표현하게 해주는 그것"(p189)
  8. 「권력의 종말」이란 책 자체에 대해 전 철저하게 과거의 기준점에 고착해 있는 채 '권력의 변화'를 잘못 바라보고 있다라 생각합니다. 즉, 이전의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었던/행사했었던 권력에 기준을 놓고 보니, 그것이 '권력의 쇠퇴'이고 결국엔 '권력의 종말'로 밖엔 보여지지 않는다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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