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목격자들 - 어린이 목소리를 위한 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연진희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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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령1이 미국을 방문했고, 인도의 간디가 단식을 했으며,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대혈전이 벌어졌고, 영국의 수상 처칠이 감기에 걸렸다. 1942년의 세계 상황 속에서는 하남성에서 삼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보다 이러한 사건들이 더 중요했다.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처칠, 간디, 아름답던 송미령,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의 대혈전은 알아도, 내 고향에서 가뭄으로 삼백만 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는 것은 모른다.

- 류전윈 作, 「1942년을 돌아보다」중, 소나무 刊, 2004.

인간의 기억은 예의 선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란 단어를 입으로 말할 때면 대부분 그 앞에 '가장 기뻤던'이라든가 혹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등의 수식어가 붙여지곤 하지요. 작가 류전윈은 한 민족에게도 그러한 기억의 선택적 취사가 작용된다라는 사실을 "5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처칠, 간디, 아름답던 송미령, 그리고 스탈린그라드의 대혈전을 알아도, 내 고향에서 가뭄으로 삼백만 명이 넘게 굶어 죽었다는 것은 모른다"라는 한 문장을 통해, 처절하게 알려주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선택'이란 행위가 개입될 여지조차 없었던 시절의 기억2이란 것이, 더군다나 그 기억의 내용이란 것들이 --- "사내아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지만, 총살이 있을 때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p202)이라든가, "우리 엄마는 젊고 아름다운데, 엄마가 젊고 아름답다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p258)다 등의, 사뭇 잔인하기만 한 것들이라면, 그리하여 그 기억들을 "42세에서 58세 사이의 장년"(p414)이 되어서도 여전히 잊어낼 수 없다라는 건, 굳이 (그런 시절을 겪었었다란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한 '민족'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일 개인에게마저도 부인될 수 없는 아픔임에 틀림 없다라 생각합니다.

​"아이는 어른과 다른 세계에서 삽니다. 아이는 높은 곳에서 보지 못하고 땅바닥에 바짝 붙어 지내잖아요. 아이의 세계에서는 비행기가 한층 무시무시하답니다. 그 세계에서는 포탄이 한층 무시무시해요."(p100)

이 책 속에 기술되어 있는, 화자(話者)들이 어린 시절에 겪어야 했던 '전쟁'의 의미는,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분석되어지는 '전쟁'과는, 이처럼 완전히 다른 것들입니다. ​그저 "머나만 곳에서 잠시 벌어지는 어떤 것"(p131)로만 추상했던 전쟁이란 것이, 어느 새 죽음에 대한 공포3를 가져다 주었고, 그 공포는 이내 "전쟁이란 아버지가 없는 시간"(p13)이란 현실을 안겨주었으며, 그것은 곧바로 "엄마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한 나머지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p155)을 뿐 아니라, "엄마는 울고 또 울다가 실명하고 말았어요."(p158)과 같은, 자신의 남겨진 가족들에게 덮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극한의 고통을 통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삶의 한 페이지를 그들의 삶에선 지워져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유년기는 내 인생에서 지워졌습니다. 난 유년기가 없는 인간입니다. 내 인생에는 유년기 대신 전쟁이 있지요."(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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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히틀러가 프로이센 장교 사회의 기사도 정신을 경멸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오히려 히틀러는 전투 상황에서 인간적인 배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 알베르트 슈페어 著,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중 p640, 마티 刊, 2016.​

​'전쟁'이란 것을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책에서 읽었었고, 기록 영화로만 보았으며, 부모님으로부터 얼핏 들었을 뿐이죠.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영화를 보고, 전쟁이란 참으로 끔찍한 것이로구나, 강준만의 책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편을 통해선 이 땅에서 일어났던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이었던가를 그저, 미루어 짐작하듯 느껴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 전쟁이란 것을 겪어보지 못한 제가 가지고 있는 '전쟁'이란 것에 대한 이미지와,

이 책 속에 등장하고 있는 화자들처럼, 전쟁의 일방적인 피해자 -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억되는 전쟁4은,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히틀러의 통치를 어떤 시각으로 해석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다."​5

​와 같은, (전쟁을 현실로 겪어보지 못한 저임에도) 역사적 맥락으로서의 전쟁에 대한 시각에까지 이르러볼 수 없음이며, 또한 그러하기에 더더욱! "파괴는 독일 국민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위"6를 주장했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대변되는, 민간인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나는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7라는 고백에 의심의 눈길을 거두어낼 수 없는 것이며, 한 번 더, 그러하기에! - "세상에는 사과를 해도 처벌을 받아야 할 일이 있다. 그 죄가 너무 무거워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과는 미미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8 란, 자신에 대한 처벌을 갈구하는 듯한 ​회개에마저도,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가란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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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한강 作, 「소년이 온다」중 p134, 창비 刊, 2014.

​산 사람을 땅 속에 묻고, '적(敵)'이라 말할 수도 없는 민간인들의 감정까지를 통제하려 했었던 그 잔인함9이란 것이, 결코 독일 민족 고유의 특성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 "과연 인간이기는 한 걸까요?"(p349)란 처절한 질문이 담고 있는, 인간임에 대한 우리가 바라고 기대하며,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믿고 있는 특질들이 정녕 올바른 것인가를 더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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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머니는 오십 년 전에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 만약 이 분처럼 초라한 수많은 백성을 무시한다면, 중국의 파란만장한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재난과 성공의 역사에서, 최대의 피해자이자 최종 수혜자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들과는 인연이 없었다. 역사는 화려하고 장엄한, 넓은 홀에서만 이루어졌다. … 할머니가 1942년을 잊은 것은 그 해에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면서 사람 죽는 일을 너무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 류전윈, 위의 책.​

"과거를 잊어버리는 인간은 악을 낳습니다"(p417)란 저자의 일갈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전장에 없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어요? 누가..."(p376)란, 이 작품 속 화자들에게 남겨진 과거는, 잊혀지길 바래어 보는 제 3자의 입장에서, 그것들이 잊혀지지 않아야함을 강요할 수 없다 생각합니다. 비록 그 기억들이 --- 류전윈의 묘사처럼, 개인에게 있어 아픈 과거에 대한 기억이란 것이, 한편으로는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또 다른 왜곡을 낳을 수도 있다 할지라도 말이죠.

"위로할 길 없는 울음"(p30)이란 구절이, 이 책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아픔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 과연 이 책을 읽은 것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제가 이 책에 담겨 있는 '위로할 길 없는 울음'들을 읽었다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 책 속 내용들이 엄연한 현실이었었으며, 그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겪어내었던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선가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을, 경탄10이 아닌 ('하지만 난 그런 전쟁을 겪지 않았다'란, 사뭇 이기적일 수도 있겠는) 감사함으로 잊지 않고 있을 뿐이겠죠.

※ 읽어본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 (수상연도 순)

- 크누트 함순(1920) : 「굶주림

- 펄 벅(1938) : 「대지

- 헤밍 웨이(1954) : 노인과 바다

- 알베르 카뮈 (1957) : 이방인」 · 「페스트

- 존 스타인벡 (1962) : 분노의 포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1970) :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윌리엄 골딩 (1983) : 파리대왕

- 주제 사라마구 (1998) : 눈 먼 자들의 도시· 죽음의 중지· 도플갱어· 예수복음· 카인」 · 「눈 뜬 자들의 도시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2010) :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 모옌 (2012) :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1. 장개석의 부인.
  2. "만약 무언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 기억에만 있을걸요."(p244)
  3. "죽을까봐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때 죽음에 대해서 뭘 알았겠어요? 도대체 뭘?"(p51) - 바샤 하렙스키(네 살)
  4. "한 여자가 선 채로 젖먹이를 안고 있었어요. 아기는 작은 병에 든 물을 빨고 있었죠. 놈들은 처음에는 병을, 그 다음에는 아기를 쐈어요. … 그러고 나서야 아기 엄마를 쏴죽이더군요."(p372)​
  5. 알베르트 슈페어, 위의 책 p813.
  6. 알베르트 슈페어, 위의 책 p690.
  7. 알베르트 슈페어, 위의 책 p190.
  8. 알베르트 슈페어, 위의 책 p830.
  9. "아낙들이 비명을 질렀어요. … 눈물을 흘리지 않고 비명만 질렀죠. … 놈들이 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거든요. 소리를 지를 테면 질러라. 단, 울지 마라. 동정하지 마라. 놈들은 우는 사람들을 다가가서 죽였어요. 열여섯 살, 열일곱 살 먹은 십대 아이들에게 총질을 하더군요. 울었다는 이유로요."(p118) …… "아빠와 오빠가 구덩이에 둥둥 떠 있어요. … 우리는 삽을 쥐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며 울어요. 그러자 놈들이 말해요. '우는 년은 쏴버리겠다. 미소를 지어.' 그자들은 우리에게 억지로 미소를 짓게 했어요. 내가 침울하게 있으면, 한 놈이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봐요. 내가 웃고 있나, 울고 있나 보려구요."(p332)
  10. "내가 세계사에서 가장 재미있게 여기는 점은 그 모든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 모든 일이 당신과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엄연한 현실로 존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은 꾸며 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워서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著, 「곰브리치 세계사」중, 비룡소 刊,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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