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 들녘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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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람의 소설 「소수의견」은 용산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용산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p440)


작가가 용산참사1를 거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말>을 통해 그 사건의 간략한 개요2('주관성을 배제시킨 채'란 표현은 차마 쓸 수 없는) 서술을 해놓고 있기만 할 뿐. 저 역시 이 소설이 '용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알고 있었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 국가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답변을 '세월호'를 통해 볼 수 있었다라면, MB 정권의 답변은 다름아닌 '용산참사'일 수 밖에 없다란 생각에, 이 책을 「거짓말이다」 다음으로 펼쳐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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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개인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종(種)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쓴다"란 작가 스스로의 자기 소개처럼, 특정 사건에 대한 (반론적) 고찰로 보기보다는 --- "법학은 정의의 학문이다. 법률은 정의를 담고 있다"3란 문장에 대한 반론, 그리고 그 반론의 시작점이 되어야 할 그렇다면 '정의(justice)'란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에 상대되는 독자의 사고(思考)를 요구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수많은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들 중, "정의는 각자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4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5이 아마도 ('용산참사'로 대표되고 있으며, 이 작품의 소재로도 다루어지고 있는) 지역 재개발과 이로 인한 철거에 적용되는 가장 적합한 정의가 되겠지요. 하지면 이 경우에도 역시나 --- 받아야 하는 편과, 주어야 하는 측의 상이한/할 수밖에 없는 '정의(justice)'는 예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 대한 계량에서의 차이6를 나타냅니다. 그 차이를 다투는 과정7에서 발생되었던 것이 '용산참사'였었으며, 또한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아현동 재개발사업8이지요. 

계량에서의 다툼이 끝내 죽음을 가져왔다라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이 다툼의 양 쪽에서 공히 모두 발생되었다라는 건 이제 (법적으로 보자면 '민사'의 영역일) 계량을 둘러싼 논쟁이 아닌 ('형사'의 관할일) 처벌을 둘러싼 다툼으로 영역을 이동시켜놓습니다. 이 소설 「소수의견」이 다루고 있는 부분 역시 '죽음9을 초래한 자/기관에 대한 처벌'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 (원래 '법'이란 게 그렇다라 할 수도 있겠으나, 무지의 영역인 법을 차치한다해도 최소한) 이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법'이란 것이 '인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지극히 냉정합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했다 하더라도 그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나버리면, 검사는 그 살인자를 기소할 수 없게 되고, 검찰의 기소가 없기에 국가 기관에 의한 공적인 처벌은 애초부터의 존재 근거를 가질 수 없다란 식으로 말이죠. 


법전이 죽음의 경건함에 대해서는 말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저 공소시효의 성립을 두고 추상적인 논리와 숫자를 다퉜다. 그게 법률가의 직무였으므로 우리에게는 거리낌이 없었다.(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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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주어진 하루마다 많은 생물들이,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상들이, 많은 문화들이 도태된다. 그것은 멸종이고 멸종은 적자생존의 법이다. 연민은 자연의 법을 거스르는 허위인가. 나는 진화론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연민은 왜 진화했는가. 그렇다면 연민은 왜 도태되지 않았는가.(p256)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한, '소수(小數)에 대한 로망'은 버려져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 생각합니다. 다수가 항상 옳다라 주장하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수가 옳을 수도 있는 확률이 더 높다라 보는 것은 확실히 비합리적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이러하기에 --- '다수가 틀렸고, 소수가 옳았다'라는 상황은 뭔가 드라마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여기에 더해, 틀린 다수가 만약 권력을 쥐고 있는 측이었으며, 권력을 지니지 못한 소수가 옳은 것으로 밝혀지는 상황은 사뭇 희열같은 것 마저 자아내곤 하며, 예의 바로 그 점이 영화나 소설 같은 픽션이 주목하곤 하는 포인트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이 작품 「소수의견」 역시10 크게 보자면,

실재(實在)하는 권력으로서의 국가, 권력을 쥐고 있는 다수11에 맞서는 소수집단과, 기확립된 판결들로 인해 무시되어왔던 소수의견들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소설입니다. 쉽게 말해 --- 검사, 경찰, 건설사, 대형 로펌 등은 다 음흉하기만 하나, 무명의 변호사와 일간지 사회부 여기자 등은 모두 정의를 최우선 가치로 삼아 행동한다, 뭐 이런 설정이란 거지요. 그리고/그러나 그 설정을 전개시키는 원동력은 '연민'이외의 그 어떤 것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① "변호사의 비극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자질구레한 일들과는 상관이 없다.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말고 한쪽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것. 그거야말로 법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전부다. … 나는 바라는가. 그건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나는 해야 했다"(p218)


② "나는 왜 국선변호인을 그만두지 못하는가. 국가가 나에게 월급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내가 국선변호인인 한 국가는 나에게 돈을 준다. 그건 의지와 생계 사이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그런 기로에 봉착하면 양자택일을 하는 대신, 그냥 현재를 택한다. 나머지 문제는 미래라는 관성에 내맡긴 채 삶을 굴려 내보내는 것이다."(p82)

조직 폭력단 두목의 수임 요청에 ①번처럼 고민했던 주인공이, 그리하여 결국 그 의뢰인의 무죄를 이끌어내었던12 주인공이, ②번에서처럼 스스로 '양자택일 대신 현재를 선택'한다는 다수를 따라, 자신도 (의지 대신 생계인) 현재를 선택하겠노라던 주인공이, (이 작품 속 핵심쟁점인 철거대상자 박재호씨의 살인죄 재판의 정식 변호사가 되기 위해13) 국선변호인 사직서를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이란 게 --- "나는 변호사였던 대통령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대통령의 죽음을 슬퍼했고 변호사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p98)이외의 이유를 보여주고 있지 못합니다.14 


소수가 다수에 저항하게 되는 이유가 명확히 적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 이외에도 --- 작가가 설정해 놓은 '다수'와 '소수'의 포지션이라는 것조차 지극히 상투적이기만 합니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법조계의 소수자임을 주장"(p71)하지요. 학벌과 실력이 그러하고, 그러하기에 현재 국선변호사나 하고 있다란 의미15입니다. 물론 주인공의 이러한 가치관은 이내 비난16에 직면합니다만, 주인공이 그 비난에 동의했다는 것이 '소수자임'을 지워버렸다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에 벗어내지 못한 한계이지요. 여기에 더해, 대법관 임명이 유력한 서울 법대의 중견 교수(염만섭 교수)와, 그의 제자인 역시나 엄청난 실력과 명성의 소유자인 신진 교수(이주민 교수)가 그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한다17라는 점 역시, 정녕 이 작품이 '소수의견'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제목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라는 의문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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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어차피 과거의 사례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쌓아나가야 하는 건 과거 어느 시점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래죠. 전례가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됩니다."18

결국, 이 작품은 "법학은 정의의 학문이다. 법률은 정의를 담고 있다"(법학 교과서 속) 문장에 대한 부동의(不同意)를 표하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법률이 정의를 담고 있지 못하다,란 주장의 한 예로, 작가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고 있지요. ---  "형사절차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은 자신이 무죄임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거짓말을 해도 처벌되지 않는다. 유죄의 입증책임은 오직 검사에게 있다"19 …… "심지어 피고인이 실제로 어떤 죄를 저질렀다 해도, 검사가 합리적 의심이 없을 만큼 입증을 못했다고 여겨진다면 피고인은 여전히 무죄입니다."(p397)란, 법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들에겐 딱히 반박할 구석을 지니지 않고 있는 듯 보여지는 이 법 구절이 소설 속 이야기에서 적용되어지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결국,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서 사실(fact)은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여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딛고 사는 세계에서 해석은 늘 강자들의 몫이었다. 진실의 상대성은 법률과 국가의 이름으로 오용되어왔다.(p439)

- 문학평론가 이정현이 쓴 <작품해설> 중

와 같은 해석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라 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 정의의 실현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 자신(을 포함한 여러 인물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해 온 재개발 조합을 향해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 왔다"(p383)란 식의 재단(裁斷)20을 해버리는 주인공의 시각은 예의, '소수'라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들이 크게는 대한민국 사회 전체, 작게는 법조계의 경계선 바깥 쪽의 이들을 향해 지니고 있는 선민의식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  이외에는 (적어도 저는)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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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들을 폭행하는 상황에서, 경찰 한 명을 둔기로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죄로 기소된 박재호는, 자신이 폭행한 경찰 역시 사망하에 되자 '특수공무방해치사죄'로 국가에 의해 기소됩니다. 이런 상황 자체 - 자신의 아들이 죽었고, 자신 역시 살인죄로 기소되어 수감된 상황 - 를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박재호를 향한 주인공의 애초 시각은 "피고인들의 검사에 대한 분노를 직면한 게 처음은 아니다. 나는 그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양가적 형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분노는 꼭 검사를 항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만이 모든 책임을 지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p40)이었더랬습니다. 그러다 나중엔,


저라면 몇 년이고 매달릴 겁니다. 이 사건은 판결까지 가야 해요. 1심에서 안 되면 고등법원, 대법원, 헌법재판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이 사건의 판결이 법대 교과서에 실려서, 100년 동안 국가과 그 대리인의 오명이 낙인찍히도록 해야 돼요. 만일 패소한다면 판사의 이름까지도 말입니다. 그들의 자식들이 법을 공부할 때는 아버지처럼 살지 말라고 배우게 될 겁니다. 그게 박재호 씨가 그 사람들에게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징벌입니다. 멈추지 마세요. 누군가 박살이 날 때 까지.(p244)

와 같은, 역사적 의의까지를 박재호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변화하지요. --- "그 어떤 창조적인 상상력으로도 현실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유감이다"(pp437-438)란 작가의 <말>이, 이 작품을 통해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작가가 원하고 있는가를 알아채는 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당연한 결론으로의 이해이어야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진공상태이던 우주를 불법들이 가득 채워버렸다면

사소한 불법 하나를 이 세계에 보태봐야

불법의 총량에는 거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p68)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위와 같은 (주인공의) 인식이, 소설의 비교적 초반부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작품에 대한 저의 기대치가 급격하게 떨어졌었으며 끝내 회복되지 않았었기에 --- "그 어떤 창조적인 상상력으로도 현실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유감이다"란 작가의 <말>에, 작가의 창조적인 상상력이 아직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대상으로서는 애매하기만 한 개념인) '현실'이 아니라, (명확한 적대적 대상으로서의) 권력/다수의 창조적 상상력이란 반박을 답변으로 내놓게 됩니다. 


당신은 대한민국이 마음에 드는가? … 대한민국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둘 있다. 하나는 다른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내 마음에 들도록 국가를 바꾸는 길이다. 다른 국적을 취득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이 이 길을 걸었다.21

자신의 작은 불법엔 선뜻 면죄부를 안겨 주는 주인공에게 과연, 정의(justice)를 위한 타인의 투쟁을 독려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인지에서부터, 작가와 저의 생각은 달랐었다라 생각합니다. 정의의 적이 무지와 무능이기도 하겠으나, 역시 정의의 진짜 적은 '정의를 해치는 것'으로 정의(定義)되는 불의 그 자체가 맞지 않을까요? 무지와 무능을 제거한 자들은 '국적을 바꾸는 길'을 선택하겠으나, 불의를 없애려는 자들은 예의 '국가를 바꾸는 길'을 선택하게 될 테이까요. 



 

  1. "사람들은 이 사건을 '용산참사'라고 불렀다" - 유시민 著, 「국가란 무엇인가」중 p20, 돌베개 刊, 2011.
  2. "2009년, 경찰은 서울시 용산구의 재개발사업 부지를 점거한 지역 세입자들을 진압했다. 화재가 일어났다. 여섯 명이 사망했다. 검찰은 현장을 살아남아 빠져나온 세입자들을 기소했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몸은 부검되었고, 산 자들의 몸은 철창에 던져졌다. 산 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다."(p437)
  3. 이상수 著, 「교양법학 강의」 중 p17, 필맥 刊, 2010.
  4. 유시민, 위의 책 p223.
  5. "정의에 관한 법철학자들의 논란이 많이 있었지만, 그 큰 줄기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서의 정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이상수, 위의 책 중 p21.
  6. "이주 보상금은 턱이 없었죠. 거기엔 권리금이 포함되지 않았소."(p64)
  7. 사실 '철거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란 것이 화폐로 환산된 계량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에도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정 반경 이내에서 동일한 거주/상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상'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의(justice)를 적용시킨다면 이것이 죽음까지 불러와야하는 문제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허나! 이러한 정의(justice)가 '용산참사'에서 적용되어질 수 없었던 건 '권리금'이라는, 법이 포용해낼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양 쪽 중 어느 한 쪽에만 비난을 퍼부을 수 없는 참 애매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생각합니다.
  8. 작가는 "사건은 실화가 아니다"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9. 철거대상자의 죽음과 경찰의 죽음.
  10. "나에게 박재호 사건은 음모가 도사리는 것이 아니라 음모가 도사여야만 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p132) …… "검찰은 이제 처벌 이상을 원했다. 그들은 처단을 원하고 있었다."(p206) --- 이런 상황과 서술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이 작품을 향해 '이건 정말 소설!'이란, 문학적 규정의 의미로서가 아닌 '소설임'을 말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11. '권력을 쥐고 있는 다수'와 '다수이기에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이라는 개념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 이 작품 속에서 그러하며, 현실에서도 그러한, '서울 법대 출신의 판사, 검사, 변호사'가 대한민국 법조계의 다수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라는 특정 상황에 대해서는 '권력을 쥐고 있는 다수'와 '다수이기에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이란 수식어는, 굳이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아도 될만큼 공히 적용될 수 있겠지요.
  12. "나는 거짓말을 요구했다. 추악한 계략을 짰다. 그러면 이길 수 있었다. 나는 배웠다. 내 스승은 검찰이다."(p224)
  13. 주인공은 국선변호인이고, 국선변호인의 고용주는 국가입니다. 국선변호인은 국가가 지정해주는 사건만을 담당할 수 있다고 소설 속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14. 작가는 책의 말미에 있는 <부록>의 표지에 "우리는 개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시대와 역사를 사는 것이다"란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자 변호사였던 노무현'의 한 마디를 적어놓고 있습니다만, 이는 예의 뒷수습과도 같은 합리화일 뿐, 이야기의 전개 와중에서는 주인공의 선택/변화를 충분히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제 독해력의 부족함으로부터 기인될 수 있음을 미리 고백합니다.
  15. "내가 어쩌다 이 법정까지 흘러왔는가. 그건 신념이라기보다는, 한발 뒤쳐진 능력과 경력과 학력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탄생한 예상치 못한 우연이었다. 모든 위대한 역사가 그렇게 탄생한다고 해도, 나는 생을 통해 체화시킨 뿌리 깊은 겸손과 열등감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pp260-261)
  16. 자신을 '법조계의 소수자'라 주장하는 주인공에게, 이준형 기자는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 당신은 결코 소수자일 수 없다라 반박합니다.
  17. 경찰의 무차별적 긴급체포권 발동으로 이주민 교수가 철거현장에서 체포됩니다. 이에 이주민 교수의 스승인 염만섭 교수가 직접 법무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자, 곧 이주민 교수를 비롯한 연행 전원이 훈방되지요. 이에 대해 이주민 교수는 "사법체계란 게 이렇게 움직이네요. 천 명의 군중도 움직이지 못한 바위가 그렇게 전화 한 통으로 굴러가더군요. 법이 졌습니다. 절망적인 밤이군요."(p155)라 탄식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법무부 장관에서 전화 한 통으로 항의하고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에게 '소수의 편'이란 수식어를 가져다 놓는 것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18. 야먀다 무네키 作, 「백년법」 하권 중 p350, 애플북스 刊, 2014.
  19. 이상수, 위의 책 p379.
  20. "나는 적어도 이들이 가진 피해의식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단지 한 세기 전의 사고방식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지지정당이 자신들의 이권을 대변하지 않느다는 사실을 판단할 능력도 안 되는 사람들. 자기 아들이, 또 자기 손자가 희생되지 않는 한 현존하는 세계의 실제 모습을 회의해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사람들.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다."(p247)
  21. 유시민, 위의 책 p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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