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가토 - 2012년 제45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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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에 대해서는 정작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그럼에도 'Economic Dynamics'라 불리우는 과목은 무지하게 길고도 어려운 수학을 가르치고는, 이러한 이유로/과정을 통해 특정 결과가 도출된/될 것이다라 말하지요. 문제는!!! --- 그렇게나 복잡한 과정에 대해서는 사람 질릴 정도의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과정의 시작점 initial point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건 그냥 "주어졌다"일 뿐. 하지만!!!


일 개인의 일생에 있어 우리가 어떠한 조건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났느냐는 실로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됩니다. 'Economic Dynamics'가 알려주었던 그 '과정'이란 것이 결국 '개천에선 용날 수 없어요'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선 일 개인에게 주어지는 탄생의 initial point - 부모의 소득수준, 교육수준, 거주 지역 등등 - 는 이내 그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일 것인가를 거의 결정지어버리고 말지요. 여기에 더해! --- 그/그녀의 20대가 가장 '꽃다운 시절'이라 한다면, 그/그녀 20대가 어떠한 시대상을 지닌 시절로 주어졌느냐가 그/그녀의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 역시, 탄생의 initial point에 못지않는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시대상이란 것이, 그 시절 우리나라는 장충체육관 안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나라였다라는 일상의 면면이었건, 국민 거의 모두가 가난했다라는 경제적 측면이었건, 그 시절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권력자/권력의 속성이 어떠했던가와 같은 시스템의 면에서였건 간, 모두 동일한 크기로 작용되는 건 매 한가지이지요.


자신이 운동권이 되고 안되는 것이 전적으로 우연에 달려 있었다는,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한때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 운동권에 몸담고 지낸 십수년의 기간에 비해 한달과 반년은 얼마나 짧은가. 그 짧은 동안 일어난 몇가지 단편적인 사건들의 우연성이 그 후의 기나긴 청장년의 삶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모든 인생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하룻밤의 방황이 창녀와 부랑아를 만들고, 한번 발각된 도둑질이 전과로 점철된 인생을 부른다. 편재하는 우연이 새처럼 날아들면 그 순간 인생은 단박에 뒤틀린다.(p390)

​'Economic Dynamics'가 initial point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못했던 이유가, 그 모든 것이 결국엔 우연이라 말해지기 때문이라 생각해버리면 --- 일 개인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지어버리는 두 가지의 우연, 개인적 initial point와 '꽃다운 시절'의 시대상, 이 두 가지를 '그 날의 광주'로 한데 결합시켜 놓은 것이, 바로 이 가슴 아픈 소설 「레가토」입니다. 왜 이 작품을 제가 가슴 아픈 소설로 읽어낼 수 밖에 없었을까요? 

신의 끝 무렵으로부터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전통연구회'라는 운동권 써클 출신 멤버들의 20대가 시작되는 그 때의 이야기이지요. "박통만 죽으면 다 잘될 줄  알았"(p187)던 그들의 20대에, 박통이 죽었음에도 20대의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은 여전히 "그냥... 모든 게 엉망진창이고... 세상이 다... 세상이 다 뒤죽박죽"(p81)이었더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 "'카타콤'이라 불리던 쾨쾨한 반지하 써클룸에서 지냈던, 사반세기도 더 지난 청춘의 옛시절"(pp29-30)이란 게 , 훗날 결국 "돌아보면 다 같이 소금기둥이 될 뿐"(p391)로만 끝내 기억되는 시절이 되고야 맙니다. 이 소설이 가슴 아프게 읽혀진 그 모든 것의 이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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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방에서 바지를 벗고 속옷을 내릴 때 그녀를 괴롭힌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지난주에 목욕을 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후회였다.(p128)

어느 특정 순간이 '현재'일 때, 우리의 인식은 미처 이 현재가 초래할 훗날을 예측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우연들의 시작이었던 바로 그 순간, 오정연을 지배하고 있었던 후회란 게 고작 목욕을 하지 않았다라는 것에 독자 역시 '어처구니없다'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이 작품을 읽는 당신이, 당신이 속한 이 나라는 --- 그 독재자의 향수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았던 이를 대통령으로 뽑았었으며, 기어이! 그 독재자의 딸마저 다시 이 나라의 지도자로 뽑아주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면, 당신의 '어처구니없다'란 느낌은 소설 속 오정연을 향한 비난이 아닌, 이 공동체의 일원인 (저도 포함된) 당신 스스로를 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현재'가 초래하는 '훗날'을 예측하지 못한다라는 인간의 한계는 거의 예외 없이 '후회'라는 감정을 안겨주지요. 또한 그 후회는 반사적으로 '과거에 대한 가정(假定)'1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리기 위해 우리는 내 허물을 알고 있는 누군가를 공격/매도하거나2, 그 반대로 타인의 공감을 찾아내곤 하거늘, 그 두 가지는 또한! 거의 모든 '우리들'에게 자리 잡고 있기에, 너무도 쉽게 찾아지지요. --- "정연은 얼떨결에 충장로 쪽 시위 군중에 섞여들었다"(p321)라는 장면에서, 또 하나의 우연을 발생3시킨 작가를 욕하면서도 이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결단이 항상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내려진다는 법은 없다. 날마다 일어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나 접했던 말들이 어느샌가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훗날 돌이켜봐도 무엇 하나를 콕 집어 원인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4

이와 같은, 그럴 듯한 이유를 기어이 찾아내,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란 면책(免責)을 구해내곤 합니다. 당신을 향한 칼날이 아닌, 오직 저만을 겨누고 있는 칼날이라 해도 부인해낼 수 없는 사실이지요. 이 소설이 저를 가슴 아프게 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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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 앞에, 닭다리는 네 개뿐인 상황이 등장합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이야기 하지요. "유전공학과 애들을 고문해서 닭과 지네를 교배시키게 하자는 얘기, 다리 갯수만 많고 살은 별로 없으면 어쩌느냐는 얘기, 차라리 닭과 코끼리를 교배해 다리 크기를 키우자는 얘기"(p231)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강철같은 대오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서자"(p48)라 했던 그들의 결론은 결국, "차라리 인간을 세뇌해 닭다리를 싫어하게 만들자는 얘기, 갈등의 씨앗인 닭을 멸종시키자는 얘기"(p231)로 마무리 지어집니다. 독재가, 일 개인에 의해 자행되는 독재가 왜 무서운 것일까요? 그건 --- "자유의 전통을 수호한다면서 이토록 후배의 자유를 유린해도 좋은지"(p50)과 같은 자기 모순의 위험성 때문이지요. 무조건 자신은 옳은, 그러하기에 그에 대한 판단의 여지를 허(許)하지 않는/ 여타의 선택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독점이 바로 독재가 내뿜는 가장 커다란 독인 겁니다.


우리의 소원은 '미제타도'이거나 '노동해방'임을 또 다시 주입시키던 선배들.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거나 독립적 자아로 사고한 적이 있었을까? 스스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노래하고 행동해야 사람 취급을 하며 자신들의 적을 닮아버린 군국주의자들이 판치던 대학 운동권이 내겐 별로 설득력 없었다.5

유신 치하의 학생 운동이 "이런저런 전제와 유보와 제한들을 무시하고 간명하게 양자택일만을 요구하는 질문들의 폭력성"(p200)을 지녔던 당시의 학생 운동이, 그리하여 "무서워요. 무서운 게 죄예요? 무서워서 무섭다고 말한 게 죄예요?"(p64)란 질문에 가차없이 '그건 죄!'라 답했던 당시의 교조적이었던 학생 운동은!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그때 연탄불을 잘 타고 있었는지, …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뭇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서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6

란 일 개인의 고민에 대해,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실성한 게 아닌 다음에는 그런 자질구레한 일로 피 같은 젊음을 소진해선 안되지"(p140)라 건방진 재단(裁斷)을 해버렸던 그 시절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은, 그 학생 운동을 이끌던 이들이, "누구나 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란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며, 타인의 '현재'에 대해 역시나 그토록 무자비한 단죄를 행하였던 그들이!!!


"끊는 것은 소리내지만 식는 것은 소리 없다."(p37)


이런 식으로 소리 없이 변신하여, 고작 '참으로 요소요소가 후진'7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아놓은 그들이, 마치 그건 나의 탓이 아니란 투로 내뱉는 말이란 게8 --- "정치인이 정계에서 물러나 청소부가 되고 교사가 되고 주부가 될 수 없는 후진성이 우리 정치의 현주소다. 한낱 농부가 되려 했던 전직 대통령을 깎아지른 자살의 벼랑으로 내모는 참혹성이 우리 정치의 운명이다"(p36)라는 게, 다시 한 번 더, 이 소설을 가슴 아프게 읽어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9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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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고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10

​'그 날의 광주'를 이야기하며, 작가 한강은 위처럼 '인간의 본질'에 관해 물었다라 생각합니다. 반면, 작가 신경숙은 「외딴 방」을 통해 두 명의 독재자가 지배했던 시절의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일 개인의 시선에서 그려내었었지요. --- 이 작품 「레가토」를 통해 작가 권여선은 유신 하의 대한민국과, '그 날의 광주'를 살고 있었던 사람들 중 "살아야 할 이유들이 곧 싸워야 할 이유였다"(p324)라 생각했던 과거의 누군가들,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2012년의 대한민국을 향해, "Is this the real life? Is this just fantasy?"(p338)라 물었었다라 전 생각합니다.


​"앞선 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다음 음은 이미 시작되는, 그렇게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는 '레가토'주법 … 나는 이 소설이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시간이 겹쳐 뭔가를 만들어내는 레가토 독법으로 읽히기를 소망하면서 썼다."(p429, '작가의 말' 중)

이 작품이 발표된 이듬 해인 2013년 2월. 그토록 많은 이들의 '꽃다운 시절'과 개인적 initial point마저 바꾸어 놓았던 그의 딸, 한 때 '영애(令愛)'라 불리웠던 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지요. 자신의 아버지가 지닌 과오에 대해 단 한 번도 솔직한 시인을 한 적 없는 걸로 기억되는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은, 그와 동일한 시각으로 일본에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면죄를 선사합니다. --- 작가 권여선이 이 작품을 집필하며 가졌던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으며11, '다듬는다'란 작업을 지금은 할 수 조차 없는 이 감상문은 결국, 그때의 제 한 표에 대한 가슴 아픈 반성문일 수 밖에 없네요.

※ 이 작품과 더불어 아니 읽어볼 수 없을 작품들 :소년이 온다」 · 「외딴방」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도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1. "그때 정연이 그의 수치스러운 행동을 남들에게 떠벌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녀를 강제로 범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가 잡혀가기까지 영겁처럼 길었떤 그해 4월 동안 그들은 보통의 연인들처럼 사랑했을까. 그녀에게서 쪽지를 받은 날 그들이 만나서 얘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녀는 그를 용서했을까."(pp202-203)
  2. "그의 마음속엔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수치감보다 그것이 만천하에 드러나 명예가 실추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 없다면 절대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일은 그렇게 처리되어야 한다. 입맞춤이나 구타를 당했다는 얘기는 쉽게 털어놓을 수 있지만, 몸을 버렸다는, 완전히 당했다는 얘기를 결코 쉽사리 내뱉을 수 없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어이없는 혐오 속에서도 인하는 그쪽으로 치달려가는 자신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p76)
  3.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를 보자라면, 이 소설은 등장인물간의 관계에서 상당히 많은 우연적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소설에서, 그러한 우연의 남발을 맘에 들지 않는다,라 표현했었던 저이지만 이 작품에 대해서만큼은 그러한 남발에 대해 그 어떤 불만도 없습니다. 그게 이 소설의 힘!일지도 모르겠네요.
  4. 야마다 무네키 作, 「백년법(하권)」 p62, 애플북스 刊, 2014.
  5. 목수정 著,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16, 레디앙 刊, 2008.
  6. 신경숙 作, 「외딴 방」 p245, 문학동네 刊, 2014.
  7. 제 이웃분의 블로그로부터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헬조선'같은 기분 나쁜 어감의 단어보다는 훨씬 더 맘에 들어요.
  8. 물론, 그 과정 속에 저 개인의 허물스런 기여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사회를 shaping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지만, shaping 당하는 자에게도 여전히 그 결과에의 책임은 무겁게 지워지지요.
  9. 하지만, 같은 이유로 작가 황석영의 「해질 무렵」엔 화가 났지요.
  10. 한강 作 「소년이 온다」 p134, 창비 刊, 2014.
  11.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란 걸 작가는 예감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작가의 말>을 작가 권여선은 "오늘은 술을 먹고 싶다"(p431)로 마무지 짓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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